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버전 비교) [include(틀:소련군/원수)] ---- [include(틀:역대 소련군 총참모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ffd700 소비에트 연방 제22대 총참모장[br]{{{+1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br]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br]Sergey Fodorovich Akhroméev}}}'''}}}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jpg|width=100%]]}}} || ||<|2> '''{{{#ffd700 출생}}}''' ||[[1923년]] [[5월 5일]]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토르베옙스키 구 모르도비야[*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모르도비야 공화국]]] || ||<|2> '''{{{#ffd700 사망}}}''' ||[[1991년]] [[8월 24일]] (68세)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 '''{{{#ffd700 안장}}}''' ||트로예쿠롭스코이 묘지 || ||<|2> '''{{{#ffd700 재임 기간}}}''' ||제22대 총참모장 || ||[[1984년]] [[9월 6일]] ~ [[1988년]] [[12월 14일]] || ||<^|1><-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 '''복무''' ||[[소비에트 지상군]] || ||[[1940년]] ~ [[1991년]] || || '''군종''' ||[[기갑]]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참전''' ||[[독소전쟁]][br][[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 '''주요 서훈''' ||[[10월혁명훈장]][br][[레닌훈장]] (4회)[br][[소비에트연방영웅]][br][[적성훈장]] (2회) || || '''배우자''' ||타마라 바실리예브나 아흐로메예바 || || '''자녀''' ||슬하 2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련]]의 [[군인]]. == 생애 == === [[제2차 세계 대전]] === 1940년 [[모스크바]]의 제1특수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동부전선 [[해병대|해군보병대]] 하급부사관으로 복무한 뒤 다시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로 복귀했다. 1942년 5월부터 8월까지 [[흑해함대]]에서 [[함포]] 관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제28군 제197예비보병연대 소총소대장을 역임했다. 아흐로메예프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1944년 7월부터 하리코프 및 모스크바 군관구의 제14자주포여단 기계화보병대대장을 역임했다. >18개월이 지났지만 집에 돌아간 적은 없다.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겨울 내내 밖에서 잤기 때문에 따뜻했던 적이 없다. 늘 전사하거나 아사한 동무들뿐이다. 내 소중한 동지들 10명 중 8명이 죽었다. 중학교 동기 32명 중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한 2명이 끝이다. >---- >아흐로메예프의 회고록 ==== 전후 ====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SU-76]] 자주포대대 부대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SSR]] 바쿠 군관구 제31근위기계화사단 제14중전차및자주포연대 [[ISU-122]] 자주포대대장으로 임명됐다. 1952년 스탈린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프리모스코이 군관구 제39군 제190전차및자주포연대장을 역임했다.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79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승리해서 [[파키스탄]] 서부 지역을 단번에 점령했다. 이로서 [[소련 해군]]의 보급로가 완벽히 확보됐다. [[바실리 추이코프]], [[키릴 모스칼렌코]]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아흐로메예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동료들에 의하면 아흐로메예프는 밤낮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 전후 ==== 1983년 원수로 진급했다. 이로서 아흐로메예프는 [[총참모장]]을 역임하지 않고 원수로 진급한 처음이자 마지막 [[소련군]] 원수가 됐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총참모장을 역임했는데, 그는 냉전 종식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OTR-23 오카]]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량 해체에 앞장섰기 때문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눈엣가시로 등극했다. 결국 그는 반강제로 총참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8년 12월부터 [[소련 공산당]] 총서기 [[고문(직위)|고문]]을 역임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군대를 배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방사선]] 측정, 토양 제염[* 방사선에 오염된 인체, 장치, 실내시설 등에서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행동], 폐기물 처리도 아흐로메예프의 지휘 하에 진행됐다. 이후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과거 악감정을 말끔히 털어낸 고르바초프는 유능한 아흐로메예프의 사직서를 처리할 때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 [[8월 쿠데타]] 및 사망 === 아흐로메예프는 쿠데타를 피해 가족들과 [[소치]]에서 휴가를 보내다 주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을 만났다. 그는 비밀리에 비상 사태 대비 계획을 세웠다. 이후 고르바초프에게 [[소련 해체]]를 저지하겠다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흐로메예프는 고르바초프는 물론 야나예프의 신임도 얻지 못해 [[자살]]해버렸다. 목을 메달고 죽었는데, 유서와 자살론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그의 메모 역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아내에게 남겼다.] 트로예쿠롭스코이 묘지에 안장됐는데, 얼마 안 가 [[무덤]]과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또 다시 같은 자리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 >아흐로메예프는 사실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나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소련|조국]]에 닥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 >[[드미트리 야조프]] == 진급 이력 == * 1964년 4월 13일: [[소장(계급)|소장]] * 1969년 2월 21일: [[중장]] * 1974년 10월 30일: [[상장(계급)|상장]] * 1979년 4월 23일: [[대장(계급)|대장]] * 1983년 3월 25일: [[원수(계급)|원수]] [[분류:1923년 출생]][[분류:1991년 사망]][[분류:모르도비야 공화국 출신 인물]][[분류:소련군 원수]][[분류:소련군 총참모장]][[분류:소비에트연방영웅]][[분류:독소전쟁/군인]][[분류:의문사한 인물]][[분류:소련 공산당 26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27기 중앙위원회 위원]][include(틀:소련군/원수)] || '''{{{#ffe400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소련군 총참모장)] ---- [include(틀:역대 소련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40000, #D40000 20%, #D40000 80%, #a40000)" '''{{{#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2대 총참모장[br]{{{+1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br]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br]Sergey Fyodorovich Akhromeev}}}'''}}}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000000785.png|width=100%]]}}} || ||<|2> '''{{{#ffd700 출생}}}''' ||[[1923년]] [[5월 5일]]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탐보프현 스파스크구 빈드레이읍 빈드레이[br](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모르도비야 공화국]] 토르베옙스키군 빈드레이) || ||<|2> '''{{{#ffd700 사망}}}''' ||[[1991년]] [[8월 24일]] (향년 68세)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ffd700 묘소}}}''' ||트로예쿠롭스코이 묘지 || ||<|2> '''{{{#ffd700 재임기간}}}''' ||제22대 총참모장 || ||[[1984년]] [[9월 6일]] ~ [[1988년]] [[12월 1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타미라 바실리예브나 아흐로메예바 || || '''자녀''' ||딸 2명 || ||<|4> '''복무''' ||[[노농적군]] || ||[[1940년]] ~ [[1946년]] || ||[[소비에트 지상군]] || ||1946년 ~ [[1991년]] || || '''병과''' ||[[기갑]]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원수]] {{{-2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참전''' ||[[독소전쟁]][br][[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 '''주요 서훈''' ||[[10월 혁명 훈장]][br][[레닌훈장]] (4회)[br][[소비에트 연방 영웅]][br][[적성훈장]] (2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련]]의 [[군인]]. == 생애 == === [[제2차 세계 대전]] === 1940년 [[모스크바]]의 제1특수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동부전선 [[해병대|해군보병대]] 하급부사관으로 복무한 뒤 다시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로 복귀했다. 1942년 5월부터 8월까지 [[흑해함대]]에서 [[함포]] 관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육군으로 전군하여 제28군 제197예비보병연대 소총소대장을 역임했다. 아흐로메예프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1944년 7월부터 하리코프 및 모스크바 군관구의 제14자주포여단 기계화보병대대장을 역임했다. >18개월이 지났지만 집에 돌아간 적은 없다.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겨울 내내 밖에서 잤기 때문에 따뜻했던 적이 없다. 늘 전사하거나 아사한 동무들뿐이다. 내 소중한 동지들 10명 중 8명이 죽었다. 중학교 동기 32명 중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한 2명이 끝이다. >---- >아흐로메예프의 회고록 ==== 전후 ====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SU-76]] 자주포대대 부대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SSR]] 바쿠 군관구 제31근위기계화사단 제14중전차및자주포연대 [[ISU-122]] 자주포대대장으로 임명됐다. 1952년 스탈린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프리모스코이 군관구 제39군 제190전차및자주포연대장을 역임했다.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79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승리해서 [[파키스탄]] 서부 지역을 단번에 점령했다. 이로서 [[소련 해군]]의 보급로가 완벽히 확보됐다. [[바실리 추이코프]], [[키릴 모스칼렌코]]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아흐로메예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동료들에 의하면 아흐로메예프는 밤낮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 전후 ==== 1983년 원수로 진급했다. 이로서 아흐로메예프는 [[총참모장]]을 역임하지 않고 원수로 진급한 처음이자 마지막 [[소련군]] 원수가 됐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총참모장을 역임했는데, 그는 냉전 종식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합의된 [[OTR-23 오카]]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량 해체에 앞장서서 반대했기 때문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눈엣가시로 등극했다. 결국 그는 반강제로 총참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8년 12월부터 [[소련 공산당]] 총서기 [[고문(직위)|고문]]을 역임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군대를 배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방사선]] 측정, 토양 제염[* 방사선에 오염된 인체, 장치, 실내시설 등에서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행동], 폐기물 처리도 아흐로메예프의 지휘 하에 진행됐다. 이후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과거 악감정을 말끔히 털어낸 고르바초프는 유능한 아흐로메예프의 사직서를 처리할 때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 [[8월 쿠데타]] 및 사망 === 아흐로메예프는 쿠데타를 피해 가족들과 [[소치]]에서 휴가를 보내다 주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을 만났다. 그는 비밀리에 비상 사태 대비 계획을 세웠다. 이후 고르바초프에게 [[소련 해체]]를 저지하겠다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흐로메예프는 고르바초프는 물론 야나예프의 신임도 얻지 못해 [[자살]]해버렸다. 목을 메달고 죽었는데, 유서와 자살론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그의 메모 역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아내에게 남겼다.] 트로예쿠롭스코이 묘지에 안장됐는데, 얼마 안 가 [[무덤]]과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또 다시 같은 자리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 >아흐로메예프는 사실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나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소련|조국]]에 닥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 >[[드미트리 야조프]] == 진급 이력 == * 1964년 4월 13일: [[소장(계급)|소장]] * 1969년 2월 21일: [[중장]] * 1974년 10월 30일: [[상장(계급)|상장]] * 1979년 4월 23일: [[대장(계급)|대장]] * 1983년 3월 25일: [[원수(계급)|원수]] [[분류:1923년 출생]][[분류:1991년 사망]][[분류:모르도비야 공화국 출신 인물]][[분류:소련군 원수]][[분류:소련군 총참모장]][[분류:소비에트 연방 영웅]][[분류:샤른호르스트 훈장]][[분류:독소전쟁/군인]][[분류: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군인]][[분류:소련 최고회의 11기 연방평의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26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27기 중앙위원회 위원]]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