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사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고려의 역사, rd1=고려시대)] [include(틀: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include(틀:세종(조선))] ||<-2> '''{{{+1 고려사}}}[br]高麗史'''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ecumenian.com/13649_24333_4159.gif|width=100%]]}}} || || '''시기''' ||[[15세기]] [[조선]]|| || '''권 수''' ||137권 75책|| || '''분량''' ||[[918년]] ~ [[1392년]] (474년)[br][[태조(고려)|고려태조]] 원년 ~ [[공양왕]] 4년||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고려사.jpg]]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의 [[사서|사서(史書)]]. 드물게 사용되기는 하나 줄여서 '''《여사(麗史)》'''라고도 한다. 완질본으로는 현재 보물 제2115-4호로 지정되어[*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에서 보물 제2115-4호로 승격 지정]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석당박물관]]에서 보유한 판본이 있다. 이 외에서 [[연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아직 [[대한민국의 국보|국보]]나 [[대한민국의 보물|보물]]로 지정되진 않았다가 2020년 12월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으며([[https://www.yna.co.kr/view/AKR20201223050400005?input=1195m|관련기사]]), 2021년 2월 17일에 보물 제2114-1호, 제2114-2호,[* 제2114-1호와 2114-2호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 보물 제2115-1호~제2115-4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2115-1호와 2115-2호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제2115-3호는 연세대학교 소장본, 제2115-4호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본이다. 건국 후 조선 왕조는 [[태조(조선)|태조]] 대부터 동양 유교적 왕조의 전례대로 전(前) 왕조의 [[정사(역사)|정사(正史)]]를 편찬했는데, 이것이 《고려사》로서 제5대 [[문종(조선)|문종]] 원년에 와서야 완성하였다. == 편찬 과정 == 《고려사》의 편찬 기간은 60여 년이며 그만큼 많은 곡절을 가지고 완성된 역사서이다. 맨 처음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고려사》의 편찬 명령을 받은 것은 우시중 [[조준(조선)|조준]], 시랑찬성사 [[정도전]], 예문관학사 정총이었다. 명령을 받은 이듬해인 1395년 정월, 정도전과 정총이 [[편년체]]로 《고려국사》 37권을 완성하였다. 이전 왕조의 역사가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로 기술되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대기 방식으로 서술된 [[편년체]] 역사서는 필수적으로 방대한 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이전 왕조의 사료를 모아 분류하고 또 그 편찬 방향을 심의하는 사국(史局)을 열어 토론을 거친 연후에 만드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고려국사》의 편찬기간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첫번째 고려 역사 편찬의 결과물은 그 편찬을 명한 태조를 위시한 전주 이씨 왕실과 조선 건국의 주인공인 신진사대부 세력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책이 되었고, [[무인정사]]를 통해 정도전을 제거한 제3대 태종 [[이방원]]은 즉위 이후 《고려국사》의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명한다. [[태종]] 시절 《고려국사》의 개수는 [[영의정]] [[하륜]]이 맡았다. 하륜은 지춘추관사 한상경, 동지춘추관사 변계량과 함께 《고려국사》를 3분하여 각기 집에서 개수작업에 착수하기로 하나, 그해 겨울 하륜이 사망하며 개수가 중단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다시 예문관 대제학 유관, 참찬 변계량에게 《고려국사》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유관은 고려시대의 여러 용어를 당시 사용했던 그대로 싣자고 주장했고, 변계량은 유교적인 대의명분에 맞게 정정하고 고쳐 쓰자고 주장하여 책임자인 두 사관이 대립하였다. 고려시대 왕들의 묘호는 종(宗)이었고, 왕이 자신을 부르는 말은 짐(朕)이라 했으며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자는 [[태자]]라 불렀다. 변계량은 이걸 모두 조선의 입지에 맞게 바꿔부르자고 했다. 반면 유관은 그냥 있었던 그대로 직서하자고 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상태에서 교정이 잘 이뤄졌을 리가 없다. 결국 세종 6년(1424)이 되고 나서 유관과 윤회가 어떻게든 《수교고려사》를 완성하였다. 유관은 직서를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용어 표기를 고려식 그대로 하였다. [[세종대왕]]이 변계량의 명분론을 비판하고, 유관의 견해를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교고려사》는 무척 짧은 기간에 편찬된 《고려국사》를 기본으로 하여, 여전히 《고려국사》의 한계들을 그대로 답습했다. 《고려국사》는 37권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인 반면 《고려사》 최종본은 139권이다. 또한 [[정도전]] 등 당시 편찬자들의 입장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수교고려사》가 《고려국사》의 수정본인 한 근본적인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이에 세종 13년(1431) 정월, 왕은 《수교고려사》를 또 다시 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전의 개편이 용어의 직서문제 관철 위주로 돌아갔다면, 이번에는 내용 보충과 아울러 고려 역사의 체제 문제가 부각되었다. 중국 정사의 예에 따라 기전체로 하자는 주장과, [[기전체]]는 동일한 내용이 <본기>, <열전> 및 <지> 등에 중복으로 나오는 단점이 있으니 그냥 [[편년체]]로 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최종적으로는 편년체로 하되 더 많은 기록을 보충해보자는 결론이 되어 다시 개편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권제, 안지 등이 편찬 책임을 맡아 추진된 이 개편 작업은 세종 24년(1442) 《고려사 전문》이 완성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고려사 전문》은 인쇄까지 된 상태에서 문제가 터져 반포가 중지되었다. 편찬 책임자인 권제가 그의 조상인 권수평 등의 전기를 조작했다가 딱 걸려버리는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고려 역사 편찬은 이 사건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또한 다른 편찬 책임자들에게도 문책이 뒤따랐는데 자료 조작도 조작이지만 《고려사 전문》개편 과정에서 조선 왕조의 건국 무용담과 활약상이 보다 강조되기를 바랐던 왕실의 기대에 책 내용이 하나도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답답해진 세종은 고려 역사의 편찬에도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고려사 전문》의 반포가 중지된 직후부터 《[[용비어천가]]》 편찬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용비어천가》 125수의 시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내용인데 특히 태조 이성계의 활약상과 인간적 매력을 열심히 기록했다. 《용비어천가》 완성 직후 또 다시 기존 책임자들을 갈아치우고 《고려사 전문》을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한다. 작업은 제5대 문종대로 이어져 문종 원년에야 현존하는 《고려사》 139권이 만들어졌다. 《고려국사》, 《수교고려사》, 《고려사 전문》을 거쳐 최종적으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가 완성되었으며 최종 《고려사》에는 태조 이성계에 관한 기록도 많이 수록되었다. 《고려사》의 편찬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것은 조선 왕조의 건국을 신진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할 것인가, 새로운 전주 이씨 왕실 위주로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고려사》가 완성될 때까지 무려 60여 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매우 복잡했음을 말해주며, 또한 조선 초기 이씨의 왕권과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고려사》는 직서주의 원칙을 채택하여 자칫 사라져버릴 뻔했던 고려시대의 왕실 내 여러 용어들을 후대까지 있는 그대로 전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활약상도 상세히 반영하는 한편 유교적인 성격도 강하게 띄었다. 한편 불교 관계 기록은 매우 소홀하다. 예를 들어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전>에는 <고승전>이 없다. == 구성 == [include(틀:고려사)] [[기전체]] 구성이다. 고려가 이전 세 왕조의 정사에 대해 쓴 《[[삼국사기]]》와 체제가 같다. 그래서 구성도 비슷하다. 하지만 삼국을 각자 황제국 사서의 격인 <본기>로 서술한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고려사》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라서 구성하였다. ===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 《고려사》를 완성한 학자들이 임금에게 완성 사실을 알리는 전문(箋文)이다. 《삼국사기》 또한 <[[진삼국사기표]]>가 있다. 표문은 천자에게 바치는 문서 양식이다. 《삼국사기》가 표문(表文)인 것은 고려 국왕이 국내에선 천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 <고려세계>(高麗世系) === 고려 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탓에 [[의종(고려)|의종]] 대 편찬된 《편년통록》, [[충렬왕]] 대 편찬된 《편년강목》, 《강목》에 덧붙혀진 이제현의 <논평> 이 세 가지를 모두 모아 두고 이를 평가했다. === <수사관>(修史官) === 《고려사》 제작에 참여한 신하들을 기록했다. ===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 《고려사》를 기록(찬수)할 때 정한 기준으로 왜 <본기>라 안하고 <세가>라 했는지, 왜 고려의 '참람한' 왕실 예법을 격하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는지, <열전> 중 충신, 반역자를 나눈 기준은 뭔지 등을 설명했다. === 목록 상 === 《고려사》 <세가>부터 <종실 열전>까지가 목록 상이다. === 목록 하 === <종실 열전> 이하는 모두 목록 하에 포함된다. === <세가>(世家) 46권 === 제후국의 예로써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수록.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참람한 것이었다. === <지>(志) 39권 === === <연표>(年表) 2권 === === <열전>(列傳) 50권 === 본시 《[[한서]]》에서 정립된 <열전>의 순서에 의하면 <후비전>, <종실전> 다음에는 창업자와 자웅을 겨룬 <군웅 열전>이 나와야 한다. 가령 《[[명사(역사책)|명사]]》의 경우 <후비전>, <제왕전>, <공주전>이 <열전>의 첫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에 이어서 한때 태조 [[주원장]]의 주군이었던 [[곽자흥]]과 그 라이벌인 [[진우량]], [[장사성]], 원나라 측 장수인 코케테무르 등의 <열전>이 제시된 다음 [[서달]], 탕화, 송렴과 같은 명나라의 개국공신들의 <열전>이 나온다. 때문에 《고려사》에도 [[궁예]], [[견훤]]의 <열전>이 수록되고, 그다음에 창업공신의 <열전>이 나와야 하지만 궁예, 견훤의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다룬 관계로 《고려사》에서는 생략되었다. 한편 [[우왕]]과 [[창왕]]은 [[조선]] 건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에 따라 [[신돈]]의 자손으로 취급되어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수록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우창비왕설'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후기에 들어서는 우왕이 왕위를 부정하게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공민왕에 의해 아들로 인정되고,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던 만큼 <반역 열전>에 수록한 것은 부당하였다는 반성이 나오기는 했으나,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이므로 편찬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이 반영되었다. 이렇게 총 139권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 《[[고려사절요]]》인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있는 기사도 있기에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 <단군편>? === 2014년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에서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고려사》 <단군편>의 존재를 찾아내었다. 현전하는 《고려사》 판본에는 <단군편>이 없는데, 현 《고려사》는 문종대 완성한것이므로, 그 이전 본에서는 <단군편>이 있었을 수 있다. >《승정원 일기》 영조편 영조 44년(1768) 5월 22일(흐리고 비가 내림)[[http://sjw.history.go.kr/id/SJW-F44050220-01800|원문]] >---- >(....)上曰, "儒臣持高麗史初卷入侍。"出榻敎 副校理李秉鼎·李命勳進伏, 上曰, "上番讀帝王目錄。"秉鼎讀訖。上曰, "下番讀'''檀君篇'''。"命勳讀之, 上曰, "檀君之父, 古語有檀翁云然否?" 秉鼎曰, "此是好事者之說也。"必壽曰, "檀君似是氣化之物也。"秉鼎曰, "檀君, 旣是我東初立之君長", 而承旨奏語, "似涉如何?" 請推考。"上笑曰, "過去之說, 勿推, 可也。" >----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유신은 《고려사》 초권을 들고 입시하라." 하고 탑교(搨敎)[* 임금이 의정을 불러서 친히 전하는 왕명.]를 내리셨다. > >부교리 이병정과 이명훈이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상번사관이 <제왕목록>(帝王目錄)을 읽으라." > >(상번)병정이 읽기를 마치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하번(명훈)은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 >명훈이 읽으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단군의 아버지는 옛말에 단옹(檀翁)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 >병정이 아뢰었다. >"이러한 말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 >(좌승지) 필수가 아뢰었다. >"단군은 마치 기화지물(氣化之物)과 같습니다." > >병정이 아뢰었다. >"단군은 우리 동방국의 최초의 임금이 되신 분입니다." > >승지가 아뢰었다. > "관계되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 >좀 더 연구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나간 이야기니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음이 좋겠다." (하셨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고려사》는 조선 입장에서 고려를 통해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식이 담긴 책인데 단군은 그 목적과 벗어나 있어서 실제로 있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있었다면 이전 판본에는 어떤이에 의해 첨부되었으나 최종본에서는 목적에 벗어난 편목이어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역사 == [[조선]] 건국 후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고 이에 정도전이 《[[고려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을 편찬하였고, 정총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 이 때의 작업들은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기보단 고려 말 찬술된 역사서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이 올바르게 개수를 명하여 1414년~1416년에 [[하륜]]이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세종(조선)|세종]]이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조선 측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였고, 이에 1419년 9월에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이 다시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1423년 유관과 윤회(尹淮)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僭稱)의 개서[* 고려의 '''외왕내제'''적 요소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맞게 고쳐 서술했다.]에 대하여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여 제3차 개수 작업을 거쳤다. 그 후 1438년~1442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가 4번째로 개수하여 《고려사 전문》(高麗史全文)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소략한 내용과 고려시대 개칭된 용어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교정 과정에서 아직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1446년 세종은 또다시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했다. 1451년(문종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조선 [[세종(조선)|세종]] 때 일단 완성은 되었으나, 세종은 기존 판본들이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고 판단, 여러 신하들에게 돌려가며 새로 편찬하게 했다. 결국 세종 사후인 [[문종(조선)|문종]] 대가 되어서야 겨우 최종본이 나올 수 있었다. 최종본을 세종이 마음에 들어했을지는 미지수. 일각에서는 문종 대에 완성된 최종본도 세종이 살아있었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개수를 명했을 거란 농담도 있다. 그만큼 '''세종이 신경을 각별히 쓴 책이다.''' == 474년의 위엄 == 《[[조선왕조실록]]》과 견주면 빈약해 보일지 모르나 《고려사》도 상당히 방대하고 상세한 편에 속하는 사서다. 그래서 너무 내용이 많다고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를 따로 편찬했다. 다만 《고려사》가 고려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한계점이 있다. 때문에 《고려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려도경]]》 같은 당대의 기록이나, 《[[고려사절요]]》, 중국 사서 등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교차검증을 하는 게 중요하다. 사료 이외에도 금석문, 남아있는 고려의 서적, 조선시대에 고려의 풍습을 다룬 책인《용재총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을 참고해야 한다. 이런 조선시대 책에서도 고려시대의 야사나 지리, 풍습 등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개성을 다룬 <지리지> 같은 경우, 개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유풍이 많이 남았었기에 많이 참조하는 듯. 그러나 《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편찬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았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제2대 [[혜종(고려)|혜종]]부터 제7대 [[목종(고려)|목종]]까지 사료가 많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의 기틀을 세운 제6대 [[성종(고려)|성종]]이 그나마 낫지만...이는 [[여요전쟁]] 당시 개경 함락으로 사초와 공문서같은 사료를 많이 날려먹은 탓에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고려초의 경우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을 인용했고, 중기는 이제현의 논평 및 김부식이 쓴 《예종실록》과 《인종실록》을 그들의 여러 시와 함께 종합했다. 2015년에 [[영국]]에서 《고려사》 필사본 전질 풀셋트가 하나 발견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77&aid=0003436424|관련 기사]] 중국 [[청나라]]의 금석문 학자들이 조선 사신들에게 매달려 얻은 후 죽어라 연구하던 것이었다고. 8상자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만 108일이 걸렸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조선시대 이전 사료가 빈약한 한국사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보면 생각보다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다. 고려사 474년를 다룬 고려사의 분량이 약 150만자인데, 2백년의 역사를 다루는 《[[후한서]]》(장회태자 주+사마표 지 포함)은 230만자, 백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삼국지(정사)|삼국지]]》(배주 포함)는 100만자, 16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진서]]》는 188만자라 고려시대로부터 약간 적은 기간의 천년전 역사를 다루는 중국사서들의 분량을 더해서 비교했을때도 고려사의 양이 1/3 이하로 확연히 적다. 고려와 동시기를 봐도 각각 3백여년과 16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송사]]》와 《[[원사]]》는 각각 약 200만 자와 130만 6천 자 수준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의 《[[요사]]》나 《[[금사]]》, 고려 초기와 시대가 겹치는 《[[구오대사]]》, 《[[신오대사]]》를 굳이 더하지 않더라도 고려사가 확연히 열세이다.[* 한국사에서 중국의 기록과 어느정도 견줄수 있게 되는건 조선시대 이후로, 대륙 [[24사]] 전부를 다 합쳐서 3999권, 3996만 6383자인데 《[[조선왕조실록]]》은 4964만 6667자로 24사 전부 합친 양보다 더 많다. 심지어 《[[승정원일기]]》는 1600년도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는데도 2억 5천만 자 이상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고려사 연구자들은 사료의 부족함을 두고 아쉬워 하는 경우가 많다. == 한국어 번역 == [[파일:국역 고려사.jpg]] [[동아대학교]]에서 펴낸 《국역 고려사》. [[http://dongan.dau.ac.kr/news/articleView.html?idxno=900|사진 출처]] 북한에서는 1962년에서 1966년에 걸쳐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세가> 4책, <지>·<표>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번역서를 내놓았다. 이를 '아름출판사'와 '신서원'에서 《북역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는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소가 1960년 《고려사》 번역을 시작해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쳐 《역주 고려사》(譯註高麗史)라는 제목으로, <색인> 1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으로 펴냈다. 아래의 번역도 그렇고 이 책의 번역에 동아대학교가 주도적인 것은 국내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들 중 완질본 중에서는 동아대학교 소장 판본이 상태가 제일 좋기 때문.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고려사》역주사업단에서 《고려사》를 재번역했다. 동아대는 2001년 9월부터 재번역 사업을 시작해 2006년 11월에 <열전>(列傳) 9책, 2008년 8월에 <세가>(世家) 12책, 2010년 2월에 <지>(志) 7책을 간행하고, 2011년 10월 <색인> 2책을 간행함으로써 총 30책으로 《국역 고려사》 번역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아래 항목 참고. == 인터넷에서 보기 ==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https://terms.naver.com/list.naver?cid=62131&categoryId=62131|네이버 국역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2012년까진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는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지만 국역이 안돼 있었고, KRpia에서는 기관 회원에게 국역본을 공개하긴 했는데 유료였다. 뭐 KRpia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교나 지역도서관 회원이라면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절차만 거치면 집에서도 원격접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 12월 26일 부터 [[네이버]]에서 《[[삼국사기]]》 등과 마찬가지로 국역 《고려사》 서비스를 실시했다. 언제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링크를 참조. 201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고려사》 번역본이 올라왔다. [[https://zh.m.wikisource.org/wiki/%E9%AB%98%E9%BA%97%E5%8F%B2|중국어 위키문헌]]에도 《고려사》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분류:고려]][[분류:조선시대 정부의 저서]][[분류:한국 정사]][[분류:관찬사서]][[분류:기전체]][[분류:단대사]][[분류:대한민국의 보물]][[분류:규장각 소장품]][[분류: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품]][[분류: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품]][[분류:세종(조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