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당) (문서 편집)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군인]][[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창업군주]][[분류:시안시 출신 인물]][[분류:566년 출생]][[분류:635년 사망]][[분류:퇴위한 군주]]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고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수말당초 주요 세력)] ---- ||<-5> '''[[수나라|{{{#ece5b6 수의 역대 당국공}}}]]''' || || [[이병(북주)|이병]] || {{{+1 ←}}} || '''이연''' || {{{+1 →}}} || 당 건국 || ---- [include(틀:오대십국시대 십국/추존)]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5557C 0%, #666699 20%, #666699 80%, #55557C); color: #ece5b6" '''남당 추존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초대 황제[br]{{{+1 고조 성황제 | 高祖 聖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당고조이연.jpg|width=100%]]}}} || ||<|2> '''출생''' ||[[566년]] [[4월 7일]] || ||[[북주]]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618년]] [[6월 18일]] || ||[[수나라|수]] [[시안시|대흥]] 태극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635년]] [[6월 25일]] (향년 69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대안궁 수공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헌릉]](獻陵) || ||<|10> '''재위기간''' ||'''{{{#ece5b6 북주의 당국공(唐國公)}}}''' || ||[[572년]] ~ [[581년]] [[3월 4일]] || ||'''{{{#ece5b6 수의 당국공(唐國公)}}}''' || ||[[581년]] [[3월 4일]] ~ [[617년]] [[12월 20일]] || ||'''{{{#ece5b6 수의 당왕(唐王)}}}''' || ||[[617년]] [[12월 20일]] ~ [[618년]] [[6월 18일]] || ||'''{{{#ece5b6 초대 황제}}}''' || ||[[618년]] [[6월 18일]] ~ [[626년]] [[9월 4일]] || ||'''{{{#ece5b6 태상황}}}''' || ||[[626년]] [[9월 4일]] ~ [[635년]] [[6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연(淵) || || '''부모''' ||부황 [[이병(북주)|세조]][br]모후 원정황후[* 원정황후는 [[수문제]]의 황후였던 [[독고가라|문헌황후 독고씨]]의 넷째 언니였다. 즉,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고, 같은 세대라 할 수 있다.] || || '''형제자매''' ||4남 1녀 중 4남 || || '''배우자''' ||[[태목황후]] || || '''자녀''' ||22남 19녀 || || '''자''' ||숙덕(叔德) || || '''작호''' ||당국공(唐國公) → 당왕(唐王) || || '''묘호''' ||'''[[고조]](高祖)''' || || '''시호''' ||신요대성대광효황제[br](神堯大聖大光孝皇帝)[* [br][[635년]] 태무황제(太武皇帝)[br][[674년]] 신요황제(神堯皇帝)[br][[754년]] 신요대성대광효황제(神堯大聖大光孝皇帝)] || || '''연호''' ||[[무덕]](武德, [[618년]] ~ [[626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당(唐)나라]]의 건국자이자 초대 [[황제]].''' 휘는 연(淵).[* 한국인들은 세계사를 배울 때 "당고조 이연"이라고 배운다.] (조상은) 농서 성기(成紀)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농서 적도나 거록군 출신이라고도 한다. 자는 숙덕(叔德)이었다. == 생애 == === 당 황실의 계보 === '''농서 이씨'''인 당 황실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였던 '''[[노자]]'''이며, 이후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이신(전국시대)|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 [[이릉]] 등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이후 당 황실은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시대]] 후기 [[서량#s-1]]의 태조 무소왕 [[이고(서량)|이고]]의 8세손이 당고조 이연이 된다고 자처했다. 다만 자신이 직접 나서 역사 왜곡을 즐겨했던 [[당태종]] 이세민의 행적이나 《[[신당서]]》등에 붙은 후세의 가탁을 따져보면 농서 이씨 족보의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당나라 황실의 생물학적 혈통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는데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족설, 호한혼혈설 등이 있다. 설들의 출처는 진인각(陳寅恪), 장경(張競), 요미원(姚薇元) 등이다. 그런데 수 • 당의 황실이 본디 소속되어 있었던 무천진 군벌, 소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렸던 세력은 [[북위]] [[효문제]]의 적극적인 [[북위#효문제의 한화 정책|한화정책]] 이래 선비족이길 포기하고, 100년간 한족의 말과 풍습을 쓰며 한족과 혼인하고 살았던 집단이었다. 그리고 당 황실에서 고조, 태종, 고종의 모후가 선비족인 것은 확실하나 부계는 의문이다. 집안 스스로가 옛 한족 귀족의 후예를 자처했고, 다른 순수 선비족 가문들과 다르게 한족이 확실했던 사람들과도 연관이 깊었다. 이런 식이라 이들은 자타공인 한족 귀족이었으므로 생물학적 혈통 같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나라 황실의 공식 입장은 자신들이 한족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었고, 한족계 문벌귀족들도 거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태종]] 시기 법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짐의 근본은 노자에서 나왔으니 주나라의 은혜를 입고 후손을 이어서 농서에서 일어났노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법림이 듣기에 탁발씨가 존귀해지니 이씨를 자칭했다. 폐하가 이씨인데 이는 곧 탁발씨의 핏줄이며, 농서의 핏줄이 아니다." 라고 한 바 있는데, [[당태종]]에게 죽을 뻔했다. 오늘날 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선비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는 대개 수•당의 황실이 한족이 아니므로 원나라,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중국 혹은 한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한족의 귀족 출신이라고 자부했으니 그 위세나 자부심이 대단했다. 무덕 3년, 고조 이연은 일찍이 상서우복야 [[배적]]에게 이르길, >우리 이씨는 예전에 농서 지방에서 귀갑과 보옥을 상당수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제왕과 인척이 되었고, 내가 의병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천자에 올랐다. 이전 시대의 황제로 말하자면 대다수는 미천한 출신들로 군대를 지휘하고 진형을 포진시키느라 고생하면서 결코 안심하고 살지 못했다. 공은 대대로 녹을 받는 명가로 회복했고, 지위가 매우 높고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는데 어찌 고작 문서 담당 관리 출신인 [[소하]], [[조참]]과 같을 수 있겠는가?[* 소하와 조참은 전한의 개국공신 1,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초한전쟁에서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고, 소하의 경우 관이오, 제갈량에 비견되는 명재상이었다. 고작이라는 말을 들을 인물이 절대 아니다.] 오직 나와 공만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선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개국군주씩이나 되는 당고조 이연과, 그 절친인 배적이 서로 모여 옛날 황제들은 가문이 구렸던 인간들 뿐이고, 그런 사람들을 도왔던 소하나 조참 같은 사람들은 다들 신분도 천한 잡것에 불과하니 자기들 정도는 되어야 후세에 이름이 남을 거라고 자화자찬하는 황당한 장면이다. 황제부터가 이러는 판이니, 다른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하지만 옛날이든 현대든 간에 가문의 힘을 빌지 않고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한다.] >창업한 군주와 신하 모두 귀족으로 하, 은, 주 3대 이후 모든 왕조는 우리 당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고조는 팔주국 당공의 손자이며, 북주의 명의와 수나라의 원진 두 황후의 외척으로 북주 태사 두의의 딸과 결혼하여 북주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재상 소우, 진숙달은 양나라와 진나라 제왕의 아들이었고, 배구, 우문사급은 북주 태사와 [[수나라]]의 부마도위였으며, 양공인, 보덕이, 두항은 이전 왕조 사보의 후손이었다. 배적, 당검, 장손순덕, 굴돌통, 유정회, 두궤, 두종, 시소, 은개산, 이정 등은 모두 귀족의 후예였다. [[한고조]] 유방, [[소하]], [[조참]], [[한신]], [[팽월]]의 가문들에 비하면 어찌 가문의 등급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 >소면(蘇冕) 거의 전설적인 존재인 삼황 오제로부터 정통성이 이어지는 [[하나라]]와 [[상나라]], [[주나라]]에 이르는 3대 왕조만이 그나마 자기들 [[당나라]] 황실에 비빌 만하고, [[춘추전국시대]], [[진(통일왕조)|진나라]], [[한나라]], [[삼국시대(중국)|위, 촉, 오]],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등은 감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황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았던 개국공신들의 가문 역시 대단한 귀족의 가문이었다고 추켜세우면서, 뜬금없이 가만히 있던 한고조 유방을 비롯하여 [[소하]], [[조참]], [[한신]], [[팽월]] 등은 여기에 감히 댈 수도 없는 천한 것들이라고 언급한다.[* 물론 전한의 개국공신 상당수는 정말로 출신이 변변찮기는 했다. 앞서 말했듯 주나라 이후의 왕조들도 뿌리를 캐보면 꼭 한 명은 출신에 결점이 있기는 했다.] 관롱집단은 [[측천무후]]나 [[현종(당)|당현종]] 때 타격을 받아 위세가 위축되기도 하나, 귀족정치라는 큰 틀은 당나라가 이어지는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귀족이라는 계층이 절도사나 환관 등보다 약해졌기는 했지만 소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생각하기에 자유롭고 호방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미지가 당나라에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당나라는 귀족 중심의 나라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신라처럼 진골귀족이 다 해먹는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애시당초 능력에 의한 시험(물론 가문도 보기는 보았다.)인 과거라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 제일 선진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가령 당나라의 국자학은 3품관 이상의 자제, 태학은 5품관 이상, 사문학은 7품관 이상의 자제가 배우도록 규정되어, 부모의 관직에 따라 교육의 기회도 달랐다.[* 물론 흙수저가 노력해 과거에 급제해서 3품 이상이 되면 그 사람의 자식은 국자학에 다닐 수는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당나라 중후반기가 되자 귀족 출신과 과거로 합격한 진사 출신의 관료들이 맞붙은 '''우이당쟁'''(牛李黨爭)이 발생했지만 "금수저에 발끈하고 나선 명문이 아닌 집안들"이라는 것도 사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금수저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귀족 출신의 당나라 황실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일개 한족 머슴 출신이었던 [[주전충]]에 의해 씨도 안 남기고 멸족당하게 된다.[* [[오대십국시대#s-3|오대]] [[후당]]의 [[장종]] [[이존욱]]은 명백하게 그저 국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예 [[돌궐]]계인 [[사타족]] 출신이라 당 황실과 혈연적 근친도는 없었고, 남당의 이변은 당태종 이세민의 3남 이각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명백한 근거는 없다. 물론 현재로선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이미 촌수가 황실과 멀어진 일족들은 전란 와중에 변성 혹은 신분을 감추거나 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 즉위 이전 === 8세때 [[북주]]의 안주총관(安州總管)이었던 아버지 이병이 죽자, 당국공(唐國公)의 자리를 계승했다. [[문제(수)|수문제]] 양견의 아내인 [[독고가라|독고 황후]]가 작은 이모로, [[양제(수)|수양제]] 양광이 이종사촌이었다. 양제 때는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있었고, 이에 따라 훗날 태원은 왕조의 개창지로서 당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북도'''(北都)로 불리게 된다. 아버지 [[세조(당)|이병]]은 이후에 당[[세조(당)|세조]]로 추존되었다. [[태조]]가 흔히 건국자들에게 주어지는 묘호인데도 불구하고 [[남북조시대]] [[서위]]의 재상이었던 이병의 아버지이자 이연 본인의 할아버지인 [[태조(당)|이호]]가 당태조로 추존되었다. 사실상 그가 당나라 건국의 기틀을 다져놓았기 때문이다. [[617년]], [[양제(수)|수양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면서 반란이 중국 대륙 각지에서 터졌고, 이에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수도 [[시안(도시)|장안]]으로 쳐들어간 이연은 양제를 폐위하고, 수나라 최후의 황제인 황태손 양유([[공제(수)|수공제]])를 옹립하여 가월(假鉞)의 칭호 및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사지절(使持節) 겸 대도독내외제군사(大都督內外諸軍事) 및 대승상(大丞相), 당왕(唐王)에 봉해져 모든 권한을 손에 쥐었다. === 즉위 이후 === 이후 618년 3월 강남의 강도에 있었던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시해되고, 5월에 그 소식이 장안에 이르자 6월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고 했다.[* [[미국]]의 만화가인 [[래리 고닉]]은 이 과정에 있었던 한 가지 흠좀무한 일화를 자신의 책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에 의하면, 본래 [[수양제]]를 폐위하고 [[수공제]]를 옹립한 이연은 그냥 [[수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려고 했다. 이때 아들 [[이세민]]이 아버지에게 이 기회에 수나라를 멸하고 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연이 [[삼국지 10|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거부하는 통에 못내 답답해했다. 그래서 꾀를 내어 형제들과 함께 수공제의 후궁 한 명을 납치해서 아버지에게 첩으로 삼으라며 바쳤다가, 아버지 이연이 그녀와 동침하고 난 뒤에야 사실을 고했다. 덕분에 감히 황제의 여인을 범한 죄로 트집잡힐 판이 된 이연이 별 수 없이 [[공제(수)|수공제]]에게 선양을 강요하고 [[당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후에 [[태종(당)|당태종]]이 되는 진왕(秦王) 이세민은 사방에 퍼진 반란군을 백전백승으로 토벌했고, 이에 '''천책상장'''이란 별호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맏이 [[이건성]](李建成)이었다. 이세민이 당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봤을 때 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세민의 황제 등극 후 본인의 공을 과장했다고는 하지만 개국공신으로서 이세민의 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아무리 과장한다고 해도 없는 공을 있게 하지는 못했으며 기껏해야 적 숫자를 부풀린 정도다.], 아무리 이건성이 황태자였고 이연의 근거지인 태원을 사수함으로써 당나라의 천하통일에 이바지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화려한 전공에 묻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성이 유교적 장자로 황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민이 그정도 위세를 떨친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어느 정도 교통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고조 이연은 정작 이세민을 멀리하면서도 확실하게 쳐내지 못했고 결국 [[626년]] 여름에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면서 4남인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황태자 이건성이 살해당하자 3일 후 황태자에 이세민을 봉하고, 2개월 뒤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주색을 좋아했고, 그 때문에 술친구인 [[배적]](裴寂)을 우대했으며, 개국공신이었던 [[유문정]]을 처형한 것을 들어 창업자의 재질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으나 당태종 이세민의 왜곡이란 말도 있다.[* 그러나, 장안으로 끌려온 [[두건덕]]의 처형은 집행한 반면 [[왕세충]]은 구명하여 이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은 두건덕의 수하 [[유흑달]]이 끝까지 저항하게 만든 원인을 만든 적이 있고, 난세의 창업 영웅들이 대부분 군공이 있었던 반면 당나라 창업 시 군공의 대부분이 아들 이세민의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당고조가 창업 군주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이세민의 공에 업혀갔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제위에 있을 때 이세민을 의심했고, 특히 후궁 장첩여와 윤덕비의 참소에 넘어가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웃긴 점은 이래놓고 돌궐의 침략이란 말에 놀라 도로 이세민을 불러들여 돌궐을 막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는 것. 635년 태상황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신요대성대광효황제(神堯大聖大光孝皇帝)로 줄여서 성황제(聖皇帝)라고도 부르며[* 이 시호는 손자인 당고종 때 측천무후의 시호 늘리기 때 올려진 것이고, 애초에는 태황제였다. 황후인 태목황후의 시호를 보면 이해 가능하다.],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937년 [[남당]]을 세운 [[이변(남당)|이변]]은 당나라의 후예를 자처했고 남당의 종묘에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을 배향했다. 묘호와 시호는 이전 당나라 시기에 올려진 것을 사용했고 남당 자체 추존 황제들과 묘역의 대우를 동등하게 했다. == 평가 == 역대 [[창업군주]]들이나 왕조 개창자들 중에서는 평가가 안 좋은 편에 속한다. 이는 이연의 당나라 건국 및 황제 즉위와 중국 통일이 그가 주도했다기보다 그의 둘째 아들 [[태종(당)|이세민]]이 사실상 이뤄냈다는 점과 또한 후계자 문제에서도 태자 이건성, 이원길과 이세민의 대립을 중재하는 데 실패하고 [[현무문의 변|골육상쟁]]을 불러일으킨 실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통해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자신의 황제 즉위의 정당성을 위해 아버지 이연의 업적을 축소시키거나 없애는 등의 왜곡을 했을 수도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나 그 점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창업군주들에 비하면 능력은 확실히 낮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조선의 제1차 왕자의 난이 현무문의 변과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지만,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살해당한 후계자인 이방석보다는 이건성 쪽이 훨씬 정통성이 있었다. 당고조의 적자이자 자신의 친형을 살해한 패륜을 저지른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 직후 고조를 밀어내고 사실상 황제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점에서 (군사적 능력을 사실상 이세민에게 의존했을) 고조의 통치력를 높게 평가하기는 힘들다. 당고조와 비슷하게 군사적 능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수문제가 통치 능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애초에 자기 혈통에 자화자찬하는 것밖에 한게 없으니... == 자녀 == 슬하에 22남 19녀를 두었다. 특히 3녀 [[평양공주]](平陽公主) 이수녕(李秀寧, 596~623)은 정후인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의 유일한 딸이었다. 어머니도 여장부로 이름이 높았다. 수문제의 문헌황후 독고씨, 훗날의 [[측천무후]] 등을 보면 수•당 양대 왕조는 대대로 쥐어사는 남편들이었던 듯 하다. 평양공주가 시소(柴紹)와 혼인한 후 아버지 이연의 대수 반란에 가담했다. 평양공주는 갑옷을 입고 '''낭자군'''(娘子軍)이라 불린 군대 30,000명을 이끌고 직접 싸웠으며, 호현과 함곡관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후에도 낭자군은 이세민의 북벌에서 활약했다. 평양공주는 아들 시영무(柴令武)를 두었고, 다른 아들을 낳다가 27세에 죽었다. 고조는 3살때 죽은 [[위나라]] 명제 [[조예]]의 장녀 평원공주 조숙(曹淑)에게 '의'(義)라는 시호를 붙인 이래(그래서 '평원의공주'라고 부름) 두 번째로 평양공주에게 '소'(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사서에서는 평양공주를 가리켜 봉호와 시호를 합쳐 '평양소공주'(平陽昭公主)라 부른다. 그리고 개국공신의 예로 군대를 동원하여 장사를 치렀다. 여동생 동안공주(同安公主)의 손녀 왕씨는 훗날 [[고종(당)|당고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측천무후]]에 밀려나 폐위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파일:당 고조(연개소문).png]]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박규채]][*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김정렬(1917)|김정렬]] 역.]가 연기했다. 행적은 대체로 [[정사(역사)|정사]]와 일치한다. 다만 인물 [[자막]]에서는 당태조[* 당태조는 이연이 아닌 이연의 할아버지이자 초대 당국공인 [[태조(당)|이호]]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묘호]]이다.]로 잘못 나왔다. [[고구려]] 멸망 이전의 [[수나라]] 및 [[당나라]] 황제들 중 유일하게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은 [[황제]]라는 사실을 반영하여 당나라 개창 후 둘째 아들인 [[태종(당)|이세민]]과 달리 고구려와의 화친을 도모하나 이 때문에 이세민이 앙심을 품게 되고 끝내 아버지 이연의 주화론에 동조한 [[현무문의 변|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모조리 도륙해버리자]] 무기력하게 아들 이세민에게 전권을 위임하게 된다. 그래도 처음 참상을 보고받은 뒤에는 충격을 받고 [[패륜]]적인 행동을 한 아들 이세민을 꾸짖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러난 이후에는 69화의 나레이션 장면에 잠시 등장하는 것으로 출연이 끝났다.[* 힐리가한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여 비파를 타는 모습이 나온다.] 이후 박규채 배우가 2023년 7월 별세함으로서 유작이 되었다. * 2018년 드라마 <독고천하> 후반에 아주 잠깐 등장한다. 이연은 충성심있는 편이지만 그의 어머니 원정황후는 아들에게 기회가 오면 황제가 되라고 말했다. == 어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10511017223157_thumb_800.jpg|width=100%]] [[파일:external/www.startour.pe.kr/%EC%9D%B4%EC%97%B0.jpg|width=100%]]}}} ||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