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황족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한제국의 구황실, rd1=대한제국/황실)] [include(틀:일본 황실)] ||<-2> [[한국어]] || 구황족 || 구궁가 || ||<-2> [[한자]]([[정자(한자)|구자체]]) || 舊皇族 || 舊宮家 || ||<|2> [[일본어]] || [[신자체]] || 旧皇族 || 旧宮家 || || [[히라가나]] || きゅうこうぞく || きゅうみやけ || [목차] == 개요 == 구황족(舊皇族)은 1947년 10월 14일에 일제히 [[황적이탈]]한 [[미야케]] 11곳 및 황족 51명과 그들의 남계 자손을 일컫는다. == 역사 == === 세습친왕가 === 일본의 현 황족은 13세기 남북조시대 북조계열로 현 후시미계 직통이 기반인 3대 [[세습친왕가]]에 있었다. 각각 [[후시미노미야]],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3곳으로 이 가운데 후시미노미야가 적통으로 천황을 계속 내고 가쓰라노미야와 아리스가와노미야는 15세기에 생긴 후시미계 방계 세습친왕가였다. 이렇게 500년 가까이 3가문의 세습친왕가를 유지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쓰라노미야가 200년의 시간 사이 이미 너무나도 황통과 먼 가문으로 바뀌고 후시미노미야 하나만으로는 후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17세기의 [[히가시야마 덴노]]가 황통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만들었는데, 이때 현 직황족의 직계 조상인 [[간인노미야]]가 탄생했다. 이것이 4대 세습친왕가이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로, 히가시야마 천황이 죽은 지 4대 70년 만에 후시미계 직계 황통은 [[고모모조노 덴노]]를 마지막으로 단절한다. 이때 간인계에서 [[고카쿠 덴노]]를 내면서, 황통은 간인계로 넘어갔다. 후시미노미야에서 간인노미야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 후시미노미야에서는 수많은 분가들이 나오는데, 이 가문들이 이른바 지금 구황족으로 부르는 가문 가운데 후시미계의 방계 10이다. 이들은 모두 후시미노미야의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伏見宮貞敬親王)의 자손이 개창한 가문이었다. 세습친왕가 간인노미야 역시 그의 손자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고토히토 친왕]]이 계승하면서 10궁가 중 하나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세습친왕가 가운데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쓰라노미야 궁가는 단절했다. 그 뒤, 후시미노미야를 포함한 11궁가는 1947년 10월 14일 모두 [[황적이탈]]하여 [[다이쇼 덴노]]의 후손들인 직황족만 남게 된다. === 황적이탈 === [include(틀:신적강하)]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자 [[왕공족]] 및 [[화족]]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화족들은 지위를 잃고 모두 평민이 되었다. 당시 왕공족이라고 불리면서 준 황족 대우를 받고 있던 구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족]] 역시 평민으로 강하되었다. 이미 1930년대에 조선으로 돌아간 [[의친왕]]을 제외한 1947년 시점에 일본에 있다가 황적이탈된 거의 대다수의 왕공족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고생하였다고 한다. 동년 10월 14일, [[연합군 점령하 일본|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황실 역시 조치를 취했는데,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미야케]] 11곳 및 방계 황족 51명을 [[황적이탈]]시켰다. 원래는 전쟁 범죄 의혹이 있는 황족들만 황적이탈시키려고 했으나, [[히가시쿠니 나루히코|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자청해서 황적이탈를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황족들도 모두 동참하길 바란다고 언론에 발표한 결과로 방계 황족들이 모두 황적이탈된 것이다. 덤으로 재산까지 싸그리 몰수했다. 대신 일부 황족들은 황적이탈 및 재산 몰수를 대가로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 등 주기적으로 만나서 서로간의 교류·친선을 다지며 종종 현 황족들과도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 구 미야케 == [include(틀:구 미야케)] 1947년 10월 14일 황적이탈한 [[미야케]]들을 구 미야케(舊宮家)라 하며, 총 11곳 가문이 있다. 이 중 6곳은 현재 적통이 단절됐다. || '''문장''' || '''궁가''' || '''현칭''' || '''창건''' || '''비고''' || || [[파일:후시미노미야.png|width=85%]] ||[[후시미노미야]][br](伏見宮) ||후시미 씨[br](伏見氏) ||[[1456년]] ||[[세습친왕가]] 단절 예정 || || [[파일:external/dictionary.goo.ne.jp/105466.jpg|width=86%]] ||[[간인노미야]][br](閑院宮) ||간인 씨[br](閑院氏) ||[[1718년]] ||[[세습친왕가]] 적류 단절 || || [[파일:야마시나노미야.png|width=100%]] ||[[야마시나노미야]][br](山階宮) ||야마시나 씨[br](山階氏) ||[[1864년]] ||적류 단절 || || [[파일:기타시라카와노미야.jpg|width=78%]] ||[[기타시라카와노미야]][br](北白川宮) ||기타시라카와 씨[br](北白川氏) ||[[1870년]] ||적류 단절 || || [[파일:나시모토노미야 흑.png|width=88%]] ||[[나시모토노미야]][br](梨本宮) ||나시모토 씨[br](梨本氏) ||[[1871년]] ||적류 단절 || || [[파일:kuninomiyake.png|width=100%]] ||[[구니노미야]][br](久邇宮) ||구니 씨[br](久邇氏) ||[[1875년]] || || || [[파일:가야노미야.png|width=82%]] ||[[가야노미야]][br](賀陽宮) ||가요 씨[br](賀陽氏) ||[[1892년]] || || || [[파일:후시미노미야 나시모토노미야.png|width=88%]] ||[[히가시후시미노미야]][br](東伏見宮) ||히가시후시미 씨[br](東伏見氏) ||[[1903년]] ||적류 단절 || || [[파일:아사카노미야.jpg|width=100%]] ||[[아사카노미야]][br](朝香宮) ||아사카 씨[br](朝香氏) ||[[1906년]] || || || [[파일:히가시쿠니노미야.png|width=90%]] ||[[히가시쿠니노미야]][br](東久邇宮) ||히가시쿠니 씨[br](東久邇氏) ||[[1906년]] || || || [[파일:다케다노미야.jpg|width=85%]] ||[[다케다노미야]][br](竹田宮) ||다케다 씨[br](竹田氏) ||[[1906년]] || || == 1947년 기준 가계도 == [include(틀:일본 구황족 가계도)] == 복귀 주장 ==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으로서 구황족을 황족으로 복귀시키자는 주장이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947년 [[황적이탈]]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동의 없이, [[미군정]]이 강압적으로 한 조치이자 행정처분이다. [[세습친왕가]] 제도는 [[1400년]]경에 시작되어 [[1947년]] 미군정이 폐기하기 전까지 540년 가량 [[일본 황실]]의 [[전통]]이었다. 즉 '강압'에 의한 것과 '비교적' [[현대]]까지는 황실 일원이었던 만큼 [[명분]]이 있다. * 구황족들은 여전히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 등의 활동 및 인척관계로 직계황족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 법친왕(法親王)[* 태자 이외의 황자들 가운데 [[불교]]에 귀의한 이에게 주는 칭호.]이나 [[황적이탈]]했던 황족이 황족의 부족 문제로 복권한 일은 이미 전례가 있다. 각각 59대 [[우다 덴노]]의 예와 88대 [[고사가 덴노]]의 예. 첨언하자면 이는 [[바쿠후|막부]]의 [[쇼군]]에서도 사례가 있었다. * [[일본/출산율]]을 고려하면, [[히사히토]] 친왕 단일 직황족 유지보다는 4궁가 이상의 친왕가를 지킬 때 지금과 같은 남계 단절의 걱정을 덜 수 있다. 또한 황족의 단절에 이미 황적이탈한 구황가가 복권해 대를 잇는 것은 이미 과거부터 있던 일이다. 즉, 주로 전통적으로 이미 있어 오고 있던 일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에서도 내는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역시 반론은 있다.[* 여기에는 넣지 않았지만 여계계승 인정과 마찬가지도 돈 먹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황족이라고 돈이 들어가지 않고, 여계라고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직계 여성을 제치고 방계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며, 현대 [[일본국 헌법]]과 국민 감정상 부합하지 않는다.[* 그나마 가까운 방계라면 모를까 이들은 이미 500년도 전에 갈라진 집안이다.] * 구황족이 복권한 전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당시 [[황실전범]]과 같은 법률이 없던 먼 옛날의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 구황족들이 [[황적이탈]]하기 직전인 [[1947년]]부터 적용된 현행 황실전범 15조에는 '''"여자가 황족과 결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존 황족 이외의 자를 새로 황족으로 할 수 없다."'''는 제한규정을 담았다. 따라서 황실전범을 뜯어고쳐야만 이들의 복권이 가능하다.[* 물론 여계 계승도 피장파장이긴 하다.][* 구 황실전범 증보 6조에도 '''"황족에서 신적(臣籍)으로 편입된 자는 다시 황족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담겨 있어서, 이것도 황실전범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논리도 생긴다.] * 황실의 규모가 비대해지면 그만큼 의미없이 [[세금]]을 낭비한다. 또한 갑자기 황족이 된 이들이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확보할지도 불투명하다.[* 전술한 다케다 일가는 [[황적이탈]] 이후 일부 후예들이 캬바레나 매춘 시설을 이용하다가 발각된 적이 있으며, 2015년에는 그 후예의 하나인 다케다 츠네아키(竹田恒昭)가 [[대마초]] 소지 및 투약 혐의로 체포된 일이나 현 3대 당주에 있어서 막내동생인 다케다 츠네카즈(竹田恒和)는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2019년]] 자진 사임하였으며 그의 장남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는 극우 [[혐한/일본|혐한]]으로서 구황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증폭시킨 집안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화족]] 신분의 부활로 대체할 수도 없는 게, 이미 1947년에 [[신분제]]가 폐지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의 직위를 박탈한 판국에 또다시 화족을 부활시킨다는 건 전근대 신분제 사회로 회귀하자는 말과 똑같고, 이미 민주주의와 사민평등이 정착된 21세기 일본에서 국민정서에도 어긋나는 전근대적 발상이라는 반대에 부딪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 민간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황족의 [[노블리스 오블리주|품위]]를 지킬지 의문이다.[* [[일본 황실]]은 그 어떤 왕가보다도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 과거 황적에서 이탈했다가 복권한 뒤 즉위한 천황들은 가장 먼 항렬이 천황의 5세손이던 반면, 현 구황족은 모두 20세손을 넘어가는 궁가들이다.[* 이는 [[아키히토]] 천황이 [[간인노미야|간인 방계]]인 반면 구황족들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후시미계]]라서 그렇다. [[조선]]은 왕실의 대가 끊기자 [[고종(대한제국)|인조의 10세손]], 즉 철종과 17촌 이상 넘는 촌수를 거스르고 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있었다. [[프랑스]]도 [[앙리 4세]]는 [[루이 9세]]의 10세손이었다. [[살리카법]]을 채택한 왕가에서는 이렇게 대가 끊겨서 먼 친척이 계승할 때가 종종 있다.] * '''[[복불복|복귀 뒤 즉위해도 이번에는, 그들도 현재 직계 황족들처럼 일본국민과 언론의 압박을 받으면서 과연 아들을 낳아 후세를 이을 수 있을지가 또 불투명해진다.]]''' 사실 전례가 있는 황족들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다시 대가 끊겨 다른 궁가로 넘어간 때가 상당히 많다. *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이상, 세습친왕가도 단절될 위험이 있다. 구황족 가문 중 아들이 없어 단절된 가문이 절반 가까이 된다. 안정적인 황위 계승자 확보를 위해서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여계 계승도 마찬가지이다.] 구황족 본인들은 여성 천황제 자체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구황족 복귀에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다케다 가문의 발언들은 사실상 현 구황족들 의견의 대변이었다고 한다. 특히 논란이 불거지던 2000년대 초반, 구황족들이 당시 여성 천황 허락을 주장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만세일계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암살당해 마땅한 정치가!!"라고 날린 비난도 이들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보여준다. 즉 구황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황족으로 여기고, 언제든지 황족의 위치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 구황족들은 강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현 황족과의 다방면에서 교류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일본 황실]]조차도 이들을 여전히 황족에 준하는 집단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이들의 사고 방식을 보면 "현 황실조차도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황족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뭔데 우리가 다시 황족 지위로 올라가는 걸 반대하냐"라는 식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 적었듯 일본 내부에서도 구황족들의 황족 복귀에 대해서 찬성과 반론이 너무나도 팽팽한 상황[* 민간인이 된 지도 벌써 [age(1947-10-14)]년이나 지났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구황족들은 '황족'이 아니라 그저 '조금 특이한 집안내력을 가진 사람' 정도로나 취급된다. 이러한 구황족들이 갑자기 자기네 혈통 운운하면서 "우리도 현 황족들과 동급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구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이 투입된다면 어느 누구가 동의하겠는가? 이것이 대체적인 반대론자의 주장이다.]이라 현실은 뭐라고 쉽게 말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해, 여성 천황을 승인하든, 구황족을 정식으로 황족으로 복귀시키든, 대책이 있어야 한다. 양쪽 중 하나는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히사히토]]가 자라서 단 혼자서 노력을 해서 남성 자손을 포함한 적어도 2명 이상의 자녀들을 반드시 낳기를 기원해야 하지만, 그건 일본 전문가 등도 주장하듯이 상당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코무로 케이]]와 [[마코 공주]]의 결혼소동 이후 일본에서는 "구황족 가문의 아들이 공주와 결혼하게 하는 방식으로 제한적인 숫자의 구황족들이 현 황족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게 구황족 집안들 중에서 현 황족과 가까운 히가시쿠니 가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대대적인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구황족들의 전면 등장보다는, 현 여성 황족과의 결혼을 통한 우회적인 방식으로의 구황족들의 황족 복귀가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구황족 대변인 역할을 하는 다케다 가문의 극우 활동가조차도, 여성 덴노 및 여성 미야케 창설에는 반대하지만, 현 여성 황족과 구황족 남성간의 결혼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구황족들도 자신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황족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근황 == 1947년 [[황적이탈]]로 강등당한 구황족들. 편의상 이들 가문 가운데 남계 남성 후손이 남아 있는 가문을 {{{#c00d2e '''빨간색'''}}}으로 강조했고, 남계로 단절된 가문은 --취소선-- 처리. * '''[[후시미노미야]](伏見宮)''' * --'''[[간인노미야]](閑院宮)'''-- *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 '''{{{#c00d2e [[구니노미야|{{{#c00d2e 구니노미야}}}]](久邇宮)}}}''' * '''{{{#c00d2e [[가야노미야|{{{#c00d2e 가야노미야}}}]](賀陽宮)}}}''' * '''{{{#c00d2e [[아사카노미야|{{{#c00d2e 아사카노미야}}}]](朝香宮)}}}''' * '''{{{#c00d2e [[히가시쿠니노미야|{{{#c00d2e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 '''{{{#c00d2e [[다케다노미야|{{{#c00d2e 다케다노미야}}}]](竹田宮)}}}''' *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 현재 '''가야·구니·아사카·히가시쿠니·다케다'''에 후계자가 있지만, 이들도 히가시쿠니를 빼면 대부분 간신히 혈통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대 독자인 아사카는 물론이고, 구니도 젊은 구황족이 1명. 가야에 후계자가 2명. 다케다에 3명. 히가시쿠니에 후손들이 많지만 성을 바꿨거나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떠나거나, 황적이탈 후에 태어나서 실제로는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첫째).]의 자제들만 가문을 이을 만하다. 만약 구황족 복귀가 본격화한다면 이들에게 세습친왕가의 지위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 사실 [[황족|덴노 집안]]이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결정적 이유는 [[황적이탈]]을 한 이나 그런 이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부정해서다. [[일본]]엔 [[대한민국]] 민법에 규정된 성씨불변의 원칙이 없고 세습친왕가가 아니면 자동 [[황적이탈]]이라서 조선처럼 [[철종(조선)|선제의]] [[고종(대한제국)|칠종질(七從姪 - 17촌 조카)이 뒤를 잇는 일은 없다.]] 일본 황실의 황족 남성 부족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다. 직황족만 따지면 이미 [[메이지 덴노]]의 조부인 [[닌코 덴노]] 이래로 매우 아슬아슬한 계승을 이어 왔다. 가장 가까운 간인노미야는 [[1842년]]에 나루히토(愛仁)대로 적통이 끊기고 후시미노미야의 방계에서 양자를 들였고[* 이 때문에 정통성이 떨어져서 1947년 황적이탈 당시에도 계승 서열이 최하위였다.], [[메이지 시대]]에 메이지 덴노 다음으로 혈통적으로 가까웠던 [[레이겐 덴노]] 혈통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有栖川宮熾仁)[* 레이겐 덴노의 5대손으로, 메이지 덴노의 12촌 할아버지뻘이다.]가 계승서열 1위이던 시기(1867년 2월 13일 ~ 1879년 8월 30일)가 있었을 정도로 황족 부족 문제는 고질적이었다.[* 이런 탓에 [[아리스가와노미야]]는 다루히토의 이복동생 다케히토(威仁)가 원래 [[황적이탈]]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주직을 계승하는 것을 메이지 덴노가 허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후계자이던 다케히토의 요절로 단절되어야 했다.] 다만 당시에는 후시미노미야 계통 구황족들이 건재했고, 이후 [[다이쇼 덴노]]가 4명의 아들을 남기고 [[쇼와 덴노]]가 2명,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3명의 아들을 남기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아키히토의 즉위 당시만 해도 아래 세대의 남성 황족은 5명이나 남아 있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황족 부족 문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어떻게든 남성 혈통을 찾으려 해도 가까운 남계 혈통은 '''[[레이겐 덴노]] 이후'''의 후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어떻게 어떻게 발굴해도 현재 황족과 가장 가까운 남계 혈통이 '''직황족의 20촌 안팎이다'''. 게다가 [[히가시야마 덴노]]의 후손으로 한정하면 그 20촌 안팎이라는 혈통은 타카츠카사 가문으로 입양 간 자들의 후손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방계를 포함해도 남성 황손 부족은 매우 심각하다.[* 이쪽에서 일부 우익들이나 주장하는 개념이 황별섭가의 복원이다. 일본의 [[고셋케]](오섭가) 중 일부는 도중에 단절되고 황족들이 양자로 들어가 이를 이은 가문들이 있는데, 이 중 타카츠카사 스케히라의 혈통은 '''700년 전 분가한''' 후시미노미야 계통보다 가까운 '''300년 전 분가한''' 혈통이다.([[고카쿠 덴노]]의 숙부.) 다만 이쪽도 직계는 단절되고 쿠죠가에서 양자가 들어간 지 오래고, 토쿠다이지, 야마모토, 스미토모, 무로마치 등 방계 혈통만 남아 있는 데다가, 그 외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혈통인지라 [[히사히토]] 탄생 이후 이 개념은 거의 죽은 개념이다.] [[2018년]] 여름 이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하여 현 상황의 타개책들 중 하나로 현 여성 황족이 구황족의 자손과 결혼하는 방안이 그나마 현 [[황실전범]]을 상대적으로 덜 훼손하는 방안이 아니냐는 주장에 근거하여, 구황족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일본 언론들이 이들 집안들을 추적해 본 결과 카야, 히가시쿠니, 타케다에 50대 미만 미혼 남성이 합쳐서 9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고 이 중 히가시쿠니 집안이 5명, 카야 및 타케다가 각각 2명씩 총 4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히가시쿠니 집안의 미혼 남성들은 [[히사히토]]와 비슷한 나잇대이며 가야노미야는 20대 초중반, 타케다노미야는 30~40대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각 집안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우선 히가시쿠니 집안은 자손들이 너무 어린 나머지 현 여성 황족들과의 곧바로 결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나마 2018년 기준으로 성인 이상의 나이대라 현 여성 황족과 결혼이 가능한 카야와 타케다의 경우, 카야는 20대 초중반이라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는 점, 다케다의 경우, 후손들이 극우성향을 보여 [[아키히토]] 및 [[나루히토]]가 가지고 있는 왕족관과는 대비된다는 점이 단점이다. == 계보 == * 순수 부계 기준 === 스코 덴노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 [[스코 덴노]] - [[고하나조노 덴노]][* 덴노는 [[나루히토]]의 직계만 작성, 역대 덴노의 계보는 [[일본/역대 천황]] 참조] 대수만 표시된 경우 후시미노미야 당주대수 ||<-3><#FDB3B3>북3. [[스코 덴노]] || ||<-3><#FDB3B3>1대 요시히토 || ||2대 하루히토 ||<-2><#FDB3B3>3대 & 추존. [[고스코 덴노]] || ||<-1><|1>||<#FDB3B3>102. [[고하나조노 덴노]] ||4대 사다츠네 || 4대 사다츠네 - 20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2><#FDB3B3>102. [[고하나조노 덴노]] ||<-5>4대 사다츠네 || ||<-2><#FDB3B3>103. [[고츠치미카도 덴노]] ||<-5>5대 구니타카 || ||<-2><#FDB3B3>104. [[고카시와바라 덴노]] ||<-5>6대 사다아츠 || ||<-2><#FDB3B3>105. [[고나라 덴노]] ||<-5>7대 구니츠케 || ||<-2><#FDB3B3>106. [[오기마치 덴노]] || 8대 사다야스 ||<-4>9대 구니노부 || ||<-2><#FDB3B3>추존. [[요코 덴노]] ||<|2>||<-4>10대 사다키요 || ||<-2><#FDB3B3>107. [[고요제이 덴노]] || 11대 구니나리 ||<-2>13대 사다유키 || 12대 구니미치 || ||<-2><#FDB3B3>108. [[고미즈노오 덴노]] ||<-2><|7>||<-2>14대 구니나가 ||<|7>|| ||<-2><#FDB3B3>112. [[레이겐 덴노]] ||<-2>15대 사다타케 || ||<-2><#FDB3B3>113. [[히가시야마 덴노]] || 16대 구니타다 || 18대 구니요리 || ||<#FDB3B3>114. [[나카미카도 덴노]] ||<#FDB3B3> 1대 나오히토[*A [[간인노미야]]] ||<|4>|| 19대 사다유키 || ||<#FDB3B3>115. [[사쿠라마치 덴노]] ||<#FDB3B3> 2대 & 추존. [[교코 덴노]][*A [[간인노미야]]] || 20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구니이에]] || ||<#FDB3B3>116.[[모모조노 덴노]] ||<#FDB3B3> 119. [[고카쿠 덴노]][* [[모모조노 덴노]]의 아들인 [[고모모조노 덴노]]의 아들로 입적] ||<|2>|| ||17대 사다모치[* 나이로는 전임인 구니타다와 후임인 구니요리의 조카뻘이지만 항렬로는 현손이다.]||<|1>||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이후 === 구니이에의 후손이 아닌 사람과 구니이에의 후손 중 [[황적이탈]]한 사람과 후손은 제외 구니이에의 증손까지 ||<#FDB3B3> 2대 & 추존. [[교코 덴노]][*A [[간인노미야]]] ||<#FDB3B3>119. [[고카쿠 덴노]] ||<#FDB3B3>120. [[닌코 덴노]] ||<#FDB3B3>121. [[고메이 덴노]] || ||<|14> 20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구니이에]] || 1대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아키라]][*B 야마시나노미야] || 2대 키쿠마로[*B 야마시나노미야] || 3대 타케히코[*B 야마시나노미야] || ||<|5> 1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아사히코]][*C 구니노미야] || 1대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구니노리]][*D 가야노미야] || 2대 츠네노리[*D 가야노미야] || || 2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구니요시]][*C 구니노미야] || 3대 아사아키라[*C 구니노미야] || || 3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모리마사]][*E 나시모토노미야] ||<|1>|| || 1대 [[아사카 야스히코|야스히코]][*F 아사카노미야] || 2대 타카히코[*F 아사카노미야] || || 1대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나루히코]][*G 히가시쿠니노미야] || 모리히로[*G 히가시쿠니노미야] || || 21대 사다노리 ||<-2>|| ||<|2> 2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요시히사]][*H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1대 츠네히사[*I 다케다노미야] || 2대 츠네요시[*I 다케다노미야] || || 3대 나루히사[*H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4대 나가히사[*H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 1대 [[가초노미야 히로츠네 친왕|히로츠네]][*J 가초노미야] || 2대 히로아츠[*J 가초노미야] ||<|1>|| ||<|2> 22대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사다나루]] ||<|2> 23대 & 3대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히로야스]][*J 가초노미야] || [[히로요시 왕|히로요시]] || || 4대 [[가초노미야 히로타다 왕|히로타다]][*J 가초노미야] || || 6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고토히토]][*A [[간인노미야]]] || 7대 하루히토[*A [[간인노미야]]] ||<|1>|| || 1대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요리히토]][*K 히가시후시미노미야] ||<-2>|| 구니이에의 증손부터[* 위에서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은 제외] ||<#FDB3B3> 121. [[고메이 덴노]] ||<#FDB3B3>122. [[메이지 덴노]] ||<#FDB3B3>123. [[다이쇼 덴노]] ||<#FDB3B3>124. [[쇼와 덴노]] ||<#FDB3B3>125. [[아키히토]] ||<#FDB3B3>126. [[나루히토]] || ||<|4> 2대 츠네노리[*D 가야노미야] || 3대 구니나가[*D 가야노미야] ||<-4><|2>|| || 4대 하루노리[*D 가야노미야] || ||<|2> 아키노리[*D 가야노미야] ||<|2> 5대 마사노리[*D 가야노미야] || 장남[*D 가야노미야] ||<-2><|13>|| || 차남[*D 가야노미야] || ||<|3> 3대 아사아키라[*C 구니노미야] ||<|2> 4대 구니아키[*C 구니노미야] || 장남[*C 구니노미야] ||<|2>|| || 차남[*C 구니노미야] || || 아사다케[*C 구니노미야] || 아사토시[*C 구니노미야] || 장남[*C 구니노미야] || || 2대 타카히코[*F 아사카노미야] || 3대 토모히코[*F 아사카노미야] || 아키히코[*F 아사카노미야] ||<|1>|| ||<|4>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G 히가시쿠니노미야] || 2대 [[히가시쿠니 노부히코|노부히코]][*G 히가시쿠니노미야] || 3대 유키히코[*G 히가시쿠니노미야] || 장남[*G 히가시쿠니노미야] || || 미부 모토히로[* 후손 생략] || ||<|2> 나오히코[*G 히가시쿠니노미야] || 테루히코 [*G 히가시쿠니노미야] || 장남[*G 히가시쿠니노미야] || || 무츠히코[*G 히가시쿠니노미야] || 장남[*G 히가시쿠니노미야] || || 2대 츠네요시[*I 다케다노미야] || 3대 츠네타다[*I 다케다노미야] || 4대 츠네타카[*I 다케다노미야] ||<|3>|| || 4대 나가히사[*H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5대 미치히사[*H 기타시라카와노미야] ||<|2>|| || [[히로요시 왕|히로요시]] || 24대 히로아키 ||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version=115, title2=황적이탈, version2=139)] [[분류:구황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