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도 수도회 (문서 편집) ||<-2> {{{#FFFFFF '''{{{+2 그리스도 수도회}}}'''}}} || ||<-2> [[파일:그리스도 수도회 로고.jpg]] || ||<-2> {{{-2 그리스도 수도회 로고}}}[* 삼각형: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상징.[br]배와 돛: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수도회, [[십자가]]를 각각 상징.[br]작은 타원: [[성모 마리아]]를 상징.[br]알파와 오메가: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존재할 것이라는 수도회의 영성을 상징.] || || '''모토''' ||[[하느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자([[시편]] 100:2) || || '''주보성인''' ||바뇌의 성모님 || || '''창설일''' ||1981년 5월 10일 || || '''창설자''' ||[[가경자]] 소 알로이시오(Aloysius Schwartz) [[몬시뇰]] || || '''총원장''' ||배성룡 바오로 신부 || || '''본원'''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41가길 || || '''대표주소'''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바리골길[* 본원의 주소와는 다른 파주 분원의 주소이다. 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 '찾아오는 길'에서는 이 주소로 안내하고 있다.] || || '''진출국''' ||대한민국, [[필리핀]], [[멕시코]] || || '''홈페이지''' ||[[https://boc1981.modoo.at/|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도 수도회는 남성 수도자들로 이루어진 [[가톨릭]] [[수도회]]이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구호 사업을 하던 미국 출신의 가톨릭 사제인 소{{{-2 (蘇)}}} 알로이시오{{{-2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에 의해 한국에서 처음 창설되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과 멕시코에도 한국인 [[수도자]]가 분원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분원이 존재한다. 이는 창설자 소 몬시뇰이 한국에 이어 필리핀과 멕시코에서도 구호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현재 그리스도 수도회는 파주에서 노숙인 및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자활 치료 시설인 늘푸른 자활의 집, 장애인 복지시설인 한우리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고, 서울에서 장애인 복지시설인 작은숨골 공동생활가정[* 이곳이 그리스도 수도회 서울 본원의 주소이다.]을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장애인 복지 시설인 아마데오 그리스도 나눔의 집과 직업 훈련 학교인 트리아스 그리스도 나눔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직업훈련학교가 위치한 제네럴 트리아스라는 도시는 같은 창설자가 설립한 마리아 수녀회의 본원이 위치한 곳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수도회의 분원이 존재하는 또다른 국가인 멕시코에서의 활동은 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를 통하여 전해지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위와 같은 각종 구호 및 복지 활동을 위해 '재단법인 그리스도수도회'와 '사회복지법인 그리스도수도회'를 운영 중이다. == 창설자 소 알로이시오 == 1930년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어릴 때부터 선교 사제가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https://boc1981.modoo.at/?link=8tqadfvu|그리스도수도회 홈페이지 창설자 소개]]] 그는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메리놀회 신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1952년에 마치고, 이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선교사제의 꿈에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벨기에]]의 선교 협조자회로 옮겨 루벵대학 신학부를 1957년 졸업하였다. 루벵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던 어떤 신부에게 전쟁 직후 한국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듣게 되는데, 그 신부가 바로 당시 [[대구대교구]]의 신부였던 제2대 [[천주교 마산교구|마산교구]]장 [[장병화|장병화 요셉 주교]]이다. 이로 인해 그는 한국인들을 위해 일할 결심을 하게 된다. 1957년 사제서품을 받은 소 신부는 같은 해 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천주교 부산교구|부산교구]]에 입적하였다. 소 신부는 1961년 미국에서 민간자선단체인 '한국 자선회'를 설립하여 한국에서의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부산교구 송도본당의 주임 신부로 재직하였다. [[부산]] 지역의 빈민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구호사업을 전개한 소 신부는 1964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함을 목적으로 하는 마리아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소 신부의 구호사업은 지역적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그는 여러 부랑자가 소속된 서울시립갱생원의 위탁 운영을 1980년 제의받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 수도자들인 수녀들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한 소 신부는 남성 수도자들의 수도회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81년 설립된 그리스도 수도회이다. 마리아 수녀회와 그리스도 수도회는 1981년부터 서울의 노숙자와 부랑자를 돕는 '은평의 마을'[* 2010년 철수하였다.]을 창설하고 운영하게 되었으며, 소 신부는 이후 필리핀에서도 구호사업을 이어나갔다. 소 신부는 이 밖에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구호사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고 1983년에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1989년 10월 [[루게릭병]]을 진단받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1990년 몬시뇰 호칭을 받게 된 소 몬시뇰은 병에 굴하지 않고 구호사업을 지속하였고, 투병 기간 중 멕시코에서 자신의 새로운 구호사업을 시작하였다. 1992년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자신의 구호 기관의 사제관에서 사망(선종)한 소 몬시뇰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벨기에에 머무는 동안, 소 신학생은 [[성모 발현]]이 있었던 바뇌 성모 성지에 자주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내적 평화를 얻고 가난한 이의 동정녀, 즉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의 사제직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는데, 바로 이 바뇌의 성모는 그가 한국에 세운 마리아 수녀회와 그리스도 수도회의 주보 성인이다. == 영성 == 그리스도 수도회의 가장 핵심적인 영성은 '''살아계신 그리스도 체험 영성'''이다. 옆 형제 속, [[성체성사|성체]] 속, [[성경|성서]] 속, 가난한 사람 속, 고통 속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이 영성의 내용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참 생명에 대한 체험에서 이어지는 '''참 생명과 일치 영성'''이 수도회의 2번째 영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뻐하는 것이 수도회의 3번째 영성인 '''기쁨 영성'''이다.[* 출처: [[https://boc1981.modoo.at/?link=cws1ag8t|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 영성]]] 이러한 영성은 소위 남매 수도회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수도회와 마리아 수녀회가 공유한다. == 수도자 양성 과정 == [[세례성사]]를 받은 지 3년 이상 되는 35세 이상의 미혼 남성 중 수도회 입회를 희망하는 이들을 받아들인다. 6개월의 지원기와 1년의 청원기를 거쳐 본격적인 정식 수도자로서의 첫 단계인 수련기에 도달하면 수도복을 착복하게 된다. 1년 6개월의 수련기를 거치면 허원기에 도달하여, 완전한 그리스도 수도회의 수도자가 되고 매년 자신의 서원을 갱신한다.[* 출처: [[https://boc1981.modoo.at/?link=7wqvzeqh|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 입회, 부르심]], [[https://boc1981.modoo.at/?link=ecx174nq|그리스도 수도회 홈페이지 양성과정]]] == 소개 영상 == || [youtube(N47UK6CsM8g, width=100%)] || [[분류:가톨릭 수도회]][[분류:1981년 설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