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키온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등장인물, rd1=마르시온(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2> '''{{{+1 시노페의 마르키온}}}[br]Marcion of Sinope'''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postle_John_and_Marcion_of_Sinope,_from_JPM_LIbrary_MS_748,_11th_c.jpg|width=100%]]}}} || ||<-3><:>{{{-1 '''마르키온 (우측 인물)'''[* 좌측은 [[사도 요한]]이다. 1000년 ~ 1100년 사이 그려진 그림이며, 현재 모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2> '''출생''' ||약 [[85년]]|| ||[[로마 제국]] [[시노프|시노페]]|| ||<|2> '''사망''' ||약 [[160년]] (향년 75세?)|| ||[[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 '''국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width=20]] [[로마 제국]]|| || '''사상''' ||[[마르키온주의]]|| || '''종교''' ||[[그리스도교]]|| || '''영향받은 인물''' ||[[사도 바울로]], [[케르도]] || || '''영향을 준 인물''' ||[[아돌프 폰 하르낙]] || [목차] [clearfix] == 개요 ==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단 [[신학자]]. 말시온, 마르치온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아나톨리아]] 출신으로 2세기 초에 [[로마 제국]]에서 [[이단]] 교리를 설파하다 [[파문]]당하고 독자적인 이단교파인 [[마르키온파]]를 세웠다. == 생애 ==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시노페에서 태어난, 마르키온은 오랬동안 선박 상인이자 선장으로 살았다. 그는 135년과 140년 사이에 로마로 이주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그는 60세가 되어서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부자였던 마르키온은 수많은 재산을 교회에 기부했다. 그는 144년에 로마 교회의 주류 입장이었던 영지주의(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주의)에 맞서 바울로의 [[의인론]]에 영향을 받은 독자적, 극단적인 칭의론을 주장했다가 로마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영지주의는 2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보편 교회에 의해 배격된다.] 160년경에 그가 죽기까지, 마르키온은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으로 그의 가르침을 전달했다. == 사상 == === 급진적 바울로주의 === 마르키온은 스스로를 바울로의 제자라고 여겼을 정도로 바울로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의 정초로 삼았다. 마르키온은 바울로의 [[의인론]]에 나타난 칭의적 개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구약성경을 배격했다.''' 바울로의 금욕주의를 확장시켜 결혼과 성교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 신론 ===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느님을 정의의 하느님 (율법의 하느님)으로, 신약의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 (복음의 하느님)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마르키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해, 율법의 하느님은 더 이상 세상을 구원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마르키온의 신론은 두 하느님 다 선한 하느님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영지주의가 악한 하느님과 선한 하느님으로 양분시켜 생각했다는 것과는 확연히 선을 그었다. === 그리스도론 === 마르키온은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이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십자가에 달렸다. 따라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신뢰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완벽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죽었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 최초의 정경 ===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생각을 의심했다.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책의 내용을 신뢰한다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구약성경을 제외한 최초의 정경을 정립했다. 이 마르키온의 정경에는 [[루카의 복음서]]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인들]], [[고린토서|고린토인들]], [[갈라티아서|갈라티아인들]], [[에페소서|에페소인들]], [[필립비서|필립비인들]], [[골로사이서|골로사이인들]], [[데살로니카서|데살로니카인들]], 및 [[필레몬서|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담겨 있었다. 전통적으로 마르키온의 루카의 복음서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편집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오히려 마르키온이 가지고 있었던 판본이 원래 판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일부 존재한다. === 교회 제도 === 마르키온은 원정통 교회에 맞서 체계적인 교회 제도와 직분을 내놓았다. 그의 이러한 체계화는 마르키온파가 마르키온 사후에도 몇 세기 동안 보편교회에 맞서 계속 존속시킬 수 있게 한 공급처가 될 수 있었다. == 여파 == 마르키온의 운동은 결과적으로 교부들과 교회가 정경과 체계적 교회 제도를 구성시키는 데 요인 및 원인으로 작용했다. 마르키온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은 성서비평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 구약성경을 정경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헬레니즘 철학과 상관 없다고 본 하르낙의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 평가 == 마르키온 사후,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을 영지주의 이단으로 지목하고 비판했다. 마르키온이 영지주의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이유는 당시 [[영지주의]]는 개념이 남용되어 [[조선시대]]의 [[사문난적]]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영성사 학자인 전영준 신부 등은 강의에서 "영지주의자라기보다는 교계에 반한 독자적인 교단을 세우려 했다." 주장하고, 반대로 방효익 신부 등은 저서 <영성사>에서 '마르키온은 분명히 영지주의자였다.'고 말하였다. 관점에 따라 평이 갈리는 경계선에 선 반(半) 영지주의라는 평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마르키온을 "최초의 개혁자"로 재평가한 [[루터교]]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 이후, 독일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마르키온의 성과에 대해 긍정적이기도 하다. == 매체 == [[커맨드 앤 컨커3 케인의 분노]]에 등장하는 [[Nod]]의 반 [[케인(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케인]]파 [[블랙 핸드]] 장교인 [[마르시온(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마르시온]]의 이름이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각주] [[분류: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자]][[분류:교주]][[분류:기독교 신학자]][[분류:종교 개혁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