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상벽 (문서 편집) ||<-2> '''{{{+2 변상벽}}}[br]{{{+1 卞相壁}}}''' || || '''이름''' ||변상벽(卞相壁)|| || '''본관''' ||밀양 변씨|| || '''출생''' ||[[1726년]] 이전?[* 정극순이 변상벽을 보고 쓴 '변씨화기(卞氏畵記)'라는 문헌에 의하면 1746년에 약관(20살)의 나이를 넘겼다고 하고, 변상벽의 형인 변상진이 1719년생이므로 변상벽의 생년은 1720~1726년으로 추정된다.] || || '''사망''' ||[[1775년]] 4월[* 곡성읍지에 변상벽이 1773년 5월에 부입하여 1775년 4월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 ||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width=22]] [[조선]] || || '''자 / 호''' ||완보(完甫) / 화재(和齋) || || '''직업''' ||[[화가]]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attachment/MyoJakdo_1.jpg|width=350]] || || 대표작인 '묘작도(猫雀圖)' || [[조선]] 후기 [[영조]]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고양이]]를 잘 그렸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으나,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동하다가 1763년과 1773년에 [[영조]]의 [[어진/조선(대한제국)|어진]]을 제작한 공으로 곡성현감을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생애 == 변상벽은 밀양 변씨의 [[중인]] 집안에서 [[무관]] 변운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말이 어눌하였거나 말을 잘 하지 못했으며, 사람과 만나는 것도 꺼릴 정도로 상당히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고양이]]나 [[닭]]과 같은 동물 그림 하나는 정말 잘 그렸다고 명성이 자자했는데, 이 때문에 '변고양이'나 '변계(卞鷄)'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극순의 '변씨화기(卞氏畵記)'에 의하면, 변상벽은 원래부터 고양이를 잘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산수화]]에 재능이 없는 것을 알고 고양이 그림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변상벽 본인이 "재주란 넓으면서도 조잡한 것보다는 한 가지에 정밀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이 낫다. 나 또한 산수화를 마땅히 배웠으며, 지금의 화가를 압도하여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 연습을 하였다. 저 고양이는 가축인지라 매일 사람과 친근하기에 관찰을 통해 익숙해질 수 있으며, 생리를 깨치고 모습을 익히면 그 형태를 자연히 그릴 수 있다." 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양이에 익숙해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며 그 모습을 익혔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많은 관찰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제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당시 화원으로 활동했었고, 20살에 이미 화가로 유명했기에 도화서의 화학생도(畵學生徒)로서 그림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도감에 차출되어 활동한 것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후 1763년과 1773년 두 번 영조의 [[어진/조선(대한제국)|어진]] 제작에 참여[* 두 어진 모두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하였다. 첫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구산(龜山)의 첨절제사[* 조선의 [[무관]] 관직으로, 부대의 지휘관에 해당한다.]로, 두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곡성군|곡성현]]의 현감직을 받았다. 1773년 5월 곡성 현감으로 부임되어 활동하다가 1775년 4월 사망하였다. == 작품 == 현전하는 변상벽의 작품 대부분은 고양이와 닭을 그린 작품으로, 고양이 그림 15점, 닭 그림 14점, 새를 그린 그림 두 점, 닭을 그린 그림 두 점, 토끼를 그린 그림 한 점이 남아 있다. 대표작으로는 묘작도와 [[모계영자도]], 국정추묘, [[자웅장추]], [[추자도]], [[견도]] 등이 있다. ||<-2><:>[[파일:자웅장추.jpg|width=414&height=234]] ||<-2><:> [[파일:변상벽 개.jpg|width=414&height=300]] || ||<-2><:> [[자웅장추]] ||<-2><:> [[견도]] || ||<-2><:> [[파일:모계영자도2.jpg|width=300&height=330]] ||<-2><:> [[파일:국정추묘.png|width=350&height=350]] || ||<-2><:> [[모계영자도]] (부분) ||<-2><:> 국정추묘 || 다만 안타까운 점은 진휘속고(震彙續攷)에 의하면 변상벽이 그린 [[초상화]]가 백 개를 넘겼고, 초상화도 잘 그려 '국수(國手)'라는 평을 받았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작품은 없으며,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496호 [[윤급]] 초상만 그가 그렸다고 추정될 뿐[*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변상벽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을 인용되고 있어 이로 추정할 수 있다.]이다. 오랜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인 묘사와 세심한 필치로 그려낸 생동감 있는 모습이 매우 특징적인데, 이런 [[사실주의]]적 특징은 당대와 후대 문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은 영묘화초화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김홍도]]와 [[강세황]]의 송하맹호도나 마군후의 묘도, 남계우의 작품 등에서 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 여담 == [[사도세자]]가 [[평양]]에 방문했을 때 사도세자의 [[어진/조선(대한제국)|어진]]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분류:조선의 화가]][[분류:1775년 사망]][[분류:밀양 변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