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와이 왕조 (문서 편집) [include(틀:이란의 역사)] [include(틀:이라크의 역사)] [[파일:Buyid_Dynasty_934_1055_(AD).png]] [목차] == 개요 == [[페르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최초의 [[시아파]] 왕조다. 부와이흐 왕조(페르시아어 آل بویِه / 영어 Buwaih Dynasty : 932 ~ 1055년)는 '부이 왕조'라고도 한다. [[12이맘파]]에 속했으며, [[아바스 왕조]]의 쇠퇴와 [[셀주크 제국]]의 도래 사이의 기간에 이라크와 이란을 다스렸다. == 역사 == === 배경 : 이란의 부흥 === [[사산조 페르시아]]가 [[정통 칼리파 시대|라쉬둔 칼리파조]]에 멸망당한 이후, [[페르시아]]는 [[아랍 제국]]에 약 200여년 간 편입되었으나 [[아바스 왕조]]가 분열하고 150년 동안 이란 동부 지역과 [[호라산]] 지역에서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 [[지여르 왕조]]가 흥망하는 등 이란의 세력이 다시 중흥하기 시작했다. 이를 '''이란인의 막간'''(Iranian Intermezzo)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파르 조가 사만 조에게 멸망한 이후 사만 조가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칸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면서 상대적으로 관리가 소홀해진 이란 중부 지역은 10세기 초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의 시아 계열 12이맘파(자파르파)였던 부와이 가문이 타바리스탄 ([[카스피해]] 남안/엘부르즈 산맥 북쪽)에서 흥기했다. 가문의 창시자이자 알리 이븐 부야의 아버지인 부야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 건국 === 이란 북부의 [[지여르 왕조]](930 ~ 1090년)의 장군이었던 알리 이븐 부야는 932년에 자치권을 받았다. 당시 지여르 왕조는 타바리스탄, [[하마단]], [[이스파한]] 등을 석권하며 이란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의 세력이 커지자 지여르 왕조의 창건자이자 당시 통치자였던 마르다비즈는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리는 400여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여르 조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남부 이란의 파르스로 피신했고 [[아바스 왕조]]의 총독 야쿠트를 패배시키며, 초여름에 [[쉬라즈]]에 입성했다.(934) 이에 마르다비즈가 파르스로 진군하여 알리를 복속시키고, 동생 하산이 볼모로 잡혀가는 위기를 겪었으나, 알리에게는 천운으로 마르다비즈가 935년에 암살되어 지여르 조의 세력이 약해졌다. === 이란을 통일하다 === 알리는 재빨리 [[쉬라즈]]를 회복, [[파르스]] 지방을 통일하고 동생 하산[* 마르다비즈의 암살 직후 도망쳐서 파르스로 귀환했다.]을 파견하여 [[사만 왕조]]와 대결하던 지여르 조의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했다. 한편, 지여르 왕조의 제2대 통치자인 부심기르는 사만 왕조의 침공을 격퇴해 낸 후 938년에 이스파한을 회복했다. 그러나 하산은 940년에 이스파한을 재차 점령했고, 943년에는 [[지여르 왕조]]와 [[사만 왕조]] 모두를 격파하고 [[라이]]를 함락시켰다. 알리의 또다른 동생 아흐마드는 비록 이란 동부의 [[케르만]]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945년에 [[후제스탄]]을 정복하고, 기근으로 혼란에 빠진 [[아바스 왕조]]를 공격,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945년 12월) === 아바스 칼리파의 섭정 === 945년 부와이 왕조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칼리파를 괴뢰화하던 [[튀르크]]계 맘루크를 몰아내며 시아파 페르시아계의 통치로 대체시켰다. 칼리파 알 무스타크피는 부와이 왕조의 아흐마드에게 '왕국의 간성' (무이즈 알 다울라)이라는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부와이 왕조의 집권을 공인했다. 이리하여 수니파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 부와이 가문이 장악했다. 부와이 왕조는 '대장군'(아미르 알 우마라)[* 직역하면 아미르들의 아미르. 부와이 왕조의 근원인 페르시아계의 왕중왕을 연상케 하는 명칭. 부와이 왕조 외엔 이런 칭호를 요구한 선례가 없었다.]의 직위를 가지고 칼리파를 자의적으로 폐립하면서 아바스 왕조, 정확히는 메소포타미아 및 이란 서부, 중부를 지배했다. 아흐마드는 칼리파 알 무스타크피가 그의 권위를 인정했음에도 그를 폐위한 후, 알 무티(재위 946 ~ 974년)를 옹립하였다. === 분열과 재통합 === 알리, 하산, 아흐마드 3형제의 사후, 부와이 조는 그 자녀들에 의해 분열되었으나 하산의 아들인 아두드 알 다울라가 사촌들을 모두 물리치고 949년 나라를 통일하였다. 그는 기존 영토에 오만, 타바리스탄(이란 북부), 고르간을 더하여 대제국을 이룩했고, 사만 왕조를 격파하여 이란의 확실한 맹주가 되었다. === 시아파 전성시대 ===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 즈음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서부 지역인 [[마그레브]], [[이집트]]에는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 모로코에서 이란에 이르는 이슬람 세계가 시아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호라산과 알 안달루스에만 수니파 왕조가 있었다. 다만 부와이 왕조와 서쪽의 시아파 왕조인 [[파티마 왕조]]와의 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같은 쉬아파라도 [[이스마일파]]와 12이맘파간 종파적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둘은 오히려 [[자지라]]([[알레포]] - [[모술]] 일대)의 패권을 놓고, [[함단 왕조]]에 대한 종주권을 다투었다. 게다가 이스마일파는 아예 본인들이 '이맘'이자 '할리파'라고 주장했던 반면, 부와이 왕조는 다만 아바스조 할리파의 최고 군사령관에서 만족했기에 지킬 수 있는 선은 나름 지킨 편이었다. === 재분열과 멸망 === 하지만 983년에 아두드가 죽자 제국은 다시 동•서 분열되었고 동쪽 이란 부분은 1029년에 [[가즈니 왕조]]에게 정복당했다. 11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이 1055년에 바그다드에 입성했고 부와이 왕조는 축출당해 멸망했다. 이후 [[사파비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란에서 12이맘파가 다시 흥성하게 된다. == 과학과 문화의 융성 == 부와이 군주들은 아바스 칼리프처럼 학문을 장려하여, [[이슬람 황금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슬람 학자들은 부와이 왕조를 대단히 나쁘게 평가했다. 칼리파를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든 최초의 선례였던데다 이들이 시아파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슬람 학자들의 정부론은 칼리프들이 이미 세속 권력을 거의 잃었음에도 칼리파의 자질로 군사적, 행정적 자질 또한 여전히 강조했고, 칼리파, 즉 '이맘'은 어디까지나 꾸라이쉬 부족 남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간접적으로 부와이 왕조를 압박하며 디스했다. 즉 이것은 부와이 왕조가 대정봉환하든지, 그렇지 못하겠다면 칼리파위 찬탈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강력한 의사 표시였다. 다만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부와이 왕조는 이런 학자들을 한번도 탄압하지 않고 학문적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꽤 비슷한 상황이었던 에도 막부의 교토 지식인들이 조선통신사들 앞에서나 이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반면, 부와이 왕조 치하의 순니파 학자들은 대놓고 이런 주장을 서적 출판이나 서신 교환으로 해도 아무 제제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진 초기 이슬람 특유의 관용 정신이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분류:이란의 역사]][[분류:11세기 멸망]][[분류:이슬람 제국]][[분류:아시아의 아미르국]][[분류:페르시아 제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