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가리아인 (문서 편집)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f 30%, #009b75 30%, #009b75 66%, #d01c1f 66%)" '''{{{#fff 불가리아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남유럽의 민족)] [include(틀:슬라브)] [include(틀:불가리아 관련 문서)] }}} || [목차] == 개요 == [[파일:Children_in_Bulgarian_national_costumes.jpg]] 오늘날 '불가리아인'이라는 말은 주로 [[불가리아]]에 거주하며 남슬라브어파에 속하는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후손들[* 불가리아계 터키인, 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등]을 의미한다. 굳이 이렇게 정의되는 이유는 불가리아인들의 조상 중 하나인 [[불가르]]인들이 볼가 강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불가리아인 자체는 불가르인들뿐만 아니라 트라키아인, 슬라브인의 혈통도 잇고 있으며, 이외에도 소수의 그리스계, 튀르크계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다. == 기원 == 오늘날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대]]에 [[트라키아]]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남쪽의 [[고대 그리스|그리스계 국가들]]과 맞닿아있었고, 현재의 불가리아에 살던 종족들을 [[트라키아인]]이라고 칭했는데 꽤 오랜기간 동안 부족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형성했지만 여전히 촌동네 취급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원전 146년]]에 [[로마 공화국]]에게 복속되었고 이후로 상당기간 동안 자치권을 가지기도 했지만 왕국 자체는 내분과 혼란한 정국을 거치며 기원전 46년에 멸망했고, 이후의 트라키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로마인|신민]]이 되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이는 사이 [[유연]]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 [[아바르족]]이 이 지역을 침략하고 정복했는데, 이 와중에 아바르족에게 예속되어 있던 많은 [[슬라브인]]들이 대거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당시 [[동로마]]의 [[발칸]] 외곽 지역 주민들은 [[인두세]] 때문에 + 고대 후기 뻑하면 [[이민족]]이 [[다뉴브강]]을 넘어 침략했었던 탓에[* [[3세기]] 중반 [[고트족]],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고트족, 5세기 초~중반 [[훈족]], 6세기 초중반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 등등] [[출산율]]이 낮은 편이었으나 슬라브인들은 척박한 [[동유럽]]에서 생활할 당시 사망률이 높은 편이었고, 때문에 출산율도 매우 높았다. 새로 정착한 슬라브인들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이 지역의 [[원주민]] 트라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슬라브족과 동화가 이루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로마 황제|황제]] 제위 시기 [[아바르 칸국]]은 사산 왕조와 함께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 대패하였다. 패전으로 아바르족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슬라브 부족들이 아바르 칸국에 대항해 봉기하였는데, 이 때를 틈타 [[볼가강]] 유역에 거주하던 [[불가르족]]들의 일파가 [[다뉴브 강]]을 넘어와 [[흑해]] 서부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인들을 합병하였다. 불가르족들은 681년 동로마 제국의 군대마저 격파한 후(온갈 전투: Battle of Ongal) [[흑해]] 서부 연안에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했다. [[역합병|슬라브인들이 계속 인구가 증가하면서 불가르족들도 결국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 > 864년 불가리아인들의 기독교화는 문화적 진보를 뜻했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화 과정의 완성을 의미하고, 신생 제국의 국가적, 인종적 통일성을 완결지어준 것이었다. 새로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얻은 보리스 아니 [[보리스 1세|보리스-미하일]]은 기독교화와 슬라브화에 반기를 든 불가르족 귀족들을 제압하고 [[보야르]] 52명의 목을 베게 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기독교화를 통해 문화적 발전과 내적 결속이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 > > -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오늘날 [[슬라브어파|슬라브어권]]인 불가리아 뿐 아니라 [[로망스어군|로망스어권]]인 [[루마니아]]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제국의 슬라브인 주민 후손들로, 이는 [[루마니아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다키아 왕국]]이나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반면,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세의 찬란했던 [[불가리아 제국]]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에 의해 전해진 [[정교회]]와 [[키릴 문자]]의 원형 [[글라골 문자]] 같은데서 찾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볼가강 유역에 남은 불가르인들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과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하는 [[볼가 타타르]]인들의 실질적인 직계 조상이 되었다. 볼가 타타르인과 밀접한 관계인 [[추바시인]]의 경우 중세 [[불가르어]]와 같은 오구르어파 [[추바시어]]를 사용한다. 그에 비해 볼가 타타르인들은 [[킵차크 칸국]]의 정복의 영향인지 킵차크어파에 속하는 [[타타르어]]를 사용하고 있다. === 동로마 제국 지배 시기 불가리아인 === || [[파일:5595C970-987E-44F3-A5BB-8160D29944BE.jpg]] || || 불가리아 제국 주민의 복식은 동로마 제국 복식과 거의 흡사했다. || 오늘날 불가리아인의 기원이 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바실리오스 2세]] 제위 시기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자급자족]]적인 농경 사회였으며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고, 조세를 [[화폐]]로 징수하던 동로마 제국도 불가리아의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이들에게 화폐 대신 [[곡물]]로 조세를 납부받았다. 당시 조세를 현물 대신 화폐로 거두려는 개혁이 시도된 적도 있었으나 당시 불가리아인들 사이의 큰 소요가 일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중세 불가리아는 도로망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고, 농민들에게 화폐로 조세를 납부하라는 말은 화폐를 먼 데서 곡식을 주고 구입해와서 납부하라는 이중의 수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는 불가리아 외에도 많은 [[슬라브인]]과 [[튀르크인]] 신민을 보유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성직자]]들에 의해 [[정교회]]가 전파되어 서로 [[이단/기독교|이단]] 논란이 없는 같은 종파의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물론 [[보고밀파|영지주의 계열 이단 종파]]가 산간 벽지를 중심으로 보급되기 했지만 이는 예외에 속한다.] [[12세기]] 후반 [[앙겔로스 왕조]] 시기가 시작될 무렵 동로마 전국적으로 창궐하던 [[분리주의]]의 [[아센과 페터르의 난|성공]]으로 [[불가리아 제2제국]]이 건국되면서 2세기 동안 이어진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인 지배도 끝을 맺었다. === 오스만 제국 지배시기 불가리아인 === [[오스만 제국]]은 피지배 민족들을 [[언어]]가 아닌 [[종교]]를 기준으로 분류하였으며 불가리아인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이후 불가리아인들은 “[[밀레트 제도|룸 밀레트]]”라는 [[정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파나리오테스]]라는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그리스인]] 및 [[봉건]] [[기병]] [[시파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의 다른 룸 밀레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가리아인 [[농부]]들은 [[이슬람]] 교리와 [[기독교]] 교리의 차이를 헷갈려하고 동시에 다 믿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과 오스만 위정자들 모두 불가리아인들을 방치한데다가, 불가리아인 대다수가 교통이 불편한 산지에서 자급자족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발칸 반도]]의 도로 미비로 많은 세수 손실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 이 지역에 도로망을 끝끝내 오스만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설치하지 않았다.] 이들 중 이슬람으로 신앙을 완전히 고정시킨 이들이 오늘날 포마크인의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불가리아 요리]]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는데,[* 원래 요리 문화는 먹을 게 있다고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도시]]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의 식문화를 보다 간편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따라하며 [[레시피]]를 개발해야 발전하기 시작한다.] 당시 아직 상공업 경제가 미흡했던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지중해]] 세계의 여러 요리법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근세]] [[스페인 제국|스페인]]에서 추방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을 수용했는데, 상당수의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오늘날 불가리아 영토에 정착하여 [[지중해 요리|지중해식 레시피]]를 불가리아인들에게 전파시컸던 것. 덕분에 오늘날 불가리아의 전통 요리는 유대인의 할라 빵(Challah)부터 터키식으로 고기를 포도잎에 말아 요리한 음식[* 카프카스에서도 애용하는 레시피다.]이나 [[피망]]에 소를 넣고 찐 음식 등 유럽과 중동 레시피가 골고루 잘 조화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관리들은 이웃 국가들 [[러시아 제국]]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주]]들보다는 [[농민]]들에게 훨씬 관대한 편이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식민지]]에 지나친 중과세를 부과한 것과 다르게 세율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불가리아 농촌의 조세 부담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 산간 [[농촌]]에 [[도로]]를 놓고 농법을 개선하는데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 지배는 불가리아인들이 [[서유럽]]에 비해 문명도가 급속히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16,17세기 [[프랑스 왕국|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종자의 [[곡식]]과 [[과일]] 등이 유입된 것을 계기로 영농 기술 발전이 급격히 진행되었는데, 오스만 제국도 [[옥수수]], [[토마토]], ~~[[담배]]~~등을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종자 개량이나 효율적인 영농 기술 발전이 서유럽에 비해 뒤쳐졌다. 더 심각한 것은 [[18세기]], [[19세기]] 당시 서구 국가들은 사회 간접 자본 투자를 늘리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시작하는 사이, 오스만 제국은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며 [[무슬림]] 인구 중 [[문맹률]]이 증가하며 점점 삐걱거리고 있었던 것. 오스만 제국에서 일부러 악의를 가지고 불가리아인들을 가난에 빠뜨리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불가리아는 낙후된 농업 국가로 불리한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근대 이후의 불가리아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불가리아 왕국)]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불가리아 인민공화국)] === 관련 문서 === * [[트라키아]] * [[슬라브족의 이동]] * [[불가르 칸국]] * [[불가리아 제1제국]] == 해외 분포 == === 베사라비아 불가리아인 === [[파일:Bessarabian Bulgarians in Moldova and Ukraine.jpg]] 1806~1812년과 1828~1829년 [[러시아 튀르크 전쟁]]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귀순한 불가리아인들의 후손들이 [[베사라비아]](오늘날 [[몰도바]] + [[우크라이나]]의 [[부자크]] 지역)에 정착한 것이 그 기원이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노가이 칸국|노가이족]]이 오스만 제국으로 탈주하고 남은 빈 공터에 불가리아인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1817년]]에는 불가리아 출신 이주민 마을이 12개가 있었다 하며, 그 가운데 7개는 [[가가우즈인]], 5개는 불가리아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861년]] [[루마니아]] 일대에 살던 불가리아인 2만여 명이 추가로 [[러시아 제국]]으로 귀순하면서, [[20세기]] 초 시점에서 러시아 제국 내 불가리아인 17만여 명 정도로 증가했다. 베사라비아의 불가리아인은 당시 이들을 받아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 영향으로 [[불가리아어|고유 언어]]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명목상이나마 보호받을 수 있었다. 과거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오늘날 [[몰도바]] 내에는 8만여 명, [[우크라이나]]에서는 20만여 명(불가리아계 조상을 둔 경우는 50만여 명 추산), [[러시아]] 내 2만 4천여 명(불가리아계 조상을 둔 경우는 33만여 명 이상 추산)의 불가리아인들이 남아 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후신 [[소련]]이 들어서면서 일부 베사라비아 불가리아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카자흐스탄]]에 4천여 명 정도의 불가리아인이 남아 있다고 한다. ==== 관련 문서 ==== * [[가가우지아]] * [[가가우즈인]] * [[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 [[불가리아계 러시아인]] === 포마크인 === || [[파일:B19969D6-216F-4BC4-B74B-0AD5D8ED08A0.jpg|width=100%]] || || 불가리아 무슬림 포마크인, Kosta Nachev 사진 || 포마크인([[불가리아어]]: Помаци / Pomatsi, [[영어]]: Pomaks)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계 [[무슬림]]의 후손이다. 포마크인 외에도 불가리아인 무슬림(Българи мюсюлмани), 불가리아인 무함마드교인(Българи мохамедани)으로도 불린다. [[1876년]] 불가리아인들의 봉기 과정에서 기강이 해이했던 오스만 비정규군 바시으보주크(Başıbozuk)가 [[https://en.m.wikipedia.org/wiki/Batak_massacre|불가리아인 민간인들을 상대로 대학살을 저질렀는데]], [[정교회]] 수호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운 [[러시아 제국]]이 이를 구실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결국 [[1878년]]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고 러시아의 위성 국가인 [[불가리아 공국]][* [[불가리아 왕국]]의 전신]이 수립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이 불가리아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군]]이 불가리아인 무슬림들을 상대로 약탈과 잔혹행위를 일삼았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에 복수심을 품던 불가리아인 정교도들은 [[튀르크인]]들은 물론 예전까지 같이 잘 지내던 불가리아인 무슬림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불가리아인 무슬림들은 대부분 오스만 제국 영내로 피신하거나 아니면 정교회인으로 위장한 후 산간벽지에 살게 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던 1913년 1~2월에는 [[불가리아 왕국]] 영토 내 불가리아인 무슬림 수만여 명을 대상으로 [[불가리아 정교회]]로의 반강제 개종이 이루어졌다.[* 반강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들이 대개 [[기독교]] 신앙과 이슬람 신앙을 동시에 가진 경우였기 때문.] 불가리아 왕국의 국가 정체성을 불가리아 정교회로부터 찾던 불가리아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 불가리아 문화 내 폭넓게 퍼져 있던 이슬람 관련 부분을 골라냈으며, 이에 저항하는 불가리아인 무슬림은 추방하는 정책을 폈다. 여기에 순응 못하고 반발하는 무슬림들은 대다수 [[튀르키예]]로 이주하였다. 불가리아가 이런 이유는 이슬람인에 대한 증오가 컸기 때문인데 바로 [[체르케스인]]들이 불가리아 독립 전쟁 당시에 벌인 학살과 약탈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포마크인들에겐 화풀이였을 뿐. 씁쓸하게도 이들도 당시 오스만 제국으로 가서 살면서 [[증오]]에 미쳐버렸는데 이들을 군인으로 쓰면서 벌어진 게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었다. 오늘날 튀르키예로 이주하지 않고 불가리아와 [[그리스]] 내 잔존한 포마크인은 불가리아인과 방언 수준의 차이만 나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 포마크인의 전승 중에는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불가르 칸국]]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고 주장도 있다. 포마크의 어원이 [[불가리아어]]로 도움을 뜻하는 포모그네(помогне)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메흐메트 2세]]가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이미 이슬람을 믿는 불가리아인들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는 내용도 추가된다. 다만 이는 [[리투아니아]]에서 자신들의 기원의 로마 제국이며 리투아니아 왕족은 네로 황제의 쫓겨난 친척이라는 내용의 연대기가 있는 것처럼,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는 신화일 뿐이지 실제 역사 혹은 역사 왜곡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에 35만여 명에서 60만여 명 정도의 불가리아계 [[튀르키예인]]들이 거주한다. 불가리아와 그리스에서 계속 포마크인들을 차별하고 따돌리기 때문에 현대에 튀르키예로 이민 온 사람도 많은 편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가 [[유럽]] 내 [[후진국]]이 된 이유가 전부 오스만 제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물론 [[내셔널리즘]]이 다 그렇듯이 과장도 섞여있다. 적어도 오스만 제국은 [[이란]]의 [[카자르 왕조]]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포마크인들은 잠재적인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그리스 내 포마크인들은 그리스의 [[이슬라모포비아|반이슬람 정서]] 뿐만 아니라 반불가리아 정서로도 배척받는 분위기이다. 오늘날 불가리아 내에는 67,350여 명 정도만 남아있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무슬림인 것을 숨기는 사람을 포함하면 25만여 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파일:1876892B-C340-4B94-88EF-E84E52AB8DA2.jpg]] 그리스에도 불가리아 [[국경]] 지방을 중심으로 7만여 명이 남아있으며 이들 역시 그리스인들로부터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다. [[북마케도니아]]에서도 4만~10만여 명의 포마크인([[토르베시인]])이 거주하며 이 쪽은 비교적 박해가 덜한 편이다. ==== 관련 문서 ==== * [[종교적 소수자]] * [[터키인]] * [[보슈냐크인]] * [[러시아 투르크 전쟁]] === 바나트 불가리아인 === 의외로 바로 옆에 붙어있는 [[루마니아]]에는 불가리아인 인구가 7천여 명 밖에 없는 걸로 나오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가톨릭]]을 믿고 있다. 이들은 [[바오로파]]를 믿던 소수의 불가리아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로 이주하고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바나트 자치주|바나트 지방]]에 정착했던 이유로 이들은 바나트 불가리아인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쓰는 이른바 바나트 불가리아어는 불가리아어와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며, 믿는 종파도 달랐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불가리아인들이 불가리아로 이주하던 시점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다. [[1차 대전]] 이후 바나트(Banat) 지역은 [[루마니아]], [[세르비아]], [[헝가리]]로 쪼개졌는데, 이 와중에 바나트 불가리아인들도 세 나라로 찢어져 흩어지게 되었다. [[세르비아]]에 2천여 명, [[헝가리]]에도 4천여 명이 거주한다. 의외로 불가리아 주변 국가인 루마니아, 세르비아[* 1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불가리아계 세르비아인 정교도 대다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로 편입된 불가리아 국경 지대 불가리아인 마을 출신이다.]에 정교도 불가리아인 인구가 적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발칸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당시 불가리아 주변 국가들이 자국 내 불가리아인들을 추방하거나 강제로 동화'''시켰기 때문이다. 바나트 불가리아인은 불가리아인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어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그리스]] 내에도 불가리아계 주민 후손이 30만여 명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리스 정부에서는 그리스 영내 불가리아인은 무슬림 포마크인 7만여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관련 문서 ==== * [[보이보디나 자치주]] * [[바나트 자치주]] === 노동인구 유출 === 공산권 붕괴 이후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유럽권 국가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때 마침 출산율도 급속히 하락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 출산율은 어느정도 회복은 하였지만 1.6명대로 인구대체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임금수준이 인구감소의 영향으로 급격히 상승했지만 여전히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에 크게 못미치기 때문에 인구감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농어촌과 지방 소도시가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사람이 살고있지 않는 집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독일]] 내 31만여 명, [[스페인]] 내 13만여 명, [[영국]] 내 11만여 명, [[이탈리아]] 내 6만여 명이 거주하며, 실제 체류하는 인원은 이보다 더 많다. 공산권 붕괴 이후 인구 유출이 극심했던 불가리아였지만, 2020년 코로나 19 범유행 이후 서유럽에서 불가리아로 귀환한 불가리아인 인구가 무려 50만여 명에 달하면서 30년만에 인구가 다시 증가하였다.[[https://www.economist.com/europe/2021/01/28/how-the-pandemic-reversed-old-migration-patterns-in-europe?utm_campaign=editorial-social&utm_medium=social-organic&utm_source=facebook&fbclid=IwAR1G6qaJSbsir3bfxiI6Bl0T7O1BlNOY62LAbLpMHJmn3UzO-n6qjQcYIqc|#]] 여기에는 코로나 19 외에도 [[브렉시트]] 같은 요인도 적지 않았다. === 신대륙 이주 === 주로 1890년에서 1917년 사이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또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시절과 붕괴 직후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캐나다 등지로 이주했다. 현재 [[캐나다]] 내 7만여 명의 불가리아인들이 거주하며, 미국에서 자신을 [[불가리아계 미국인]]으로 응답한 인구는 11만여 명이 나왔다. 불가리아계 미국인 단체에서는 미국인 중 조상이 불가리아계인 경우 30만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아르헨티나]] 내 7만여 명, [[브라질]] 내 6만 2천여 명의 불가리아계 인구가 거주한다. 브라질 출신 불가리아인 후손으로는 [[지우마 호세프]]가 유명하다. == 종교 == 불가리아인 대다수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믿으나 불가리아인은 과거 공산정권 시기의 국가무신론의 영향 및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세속주의 성향의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을 믿는 불가리아인들은 근대에 대부분 [[터키]]로 이주하여 불가리아계 터키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은 [[북마케도니아]]의 주민이나, [[가가우즈인]]과 친척 관계이다. 불가리아 내 불가리아인 인구는 2011년 인구조사 기준 6백만 여명이며, 이 외에도 유럽 각지에 불가리아 정교회 신도로 등록된 인구는 150~2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포마크인으로도 불리는 무슬림 불가리아인은 주로 터키를 중심으로 80만여 명으로 추산되며, 터키 내 무슬림 불가리아인들은 대부분 이제 불가리아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종교 문제로 [[헝가리]]로 이주했던 바나트 불가리아인도 있으며, 이들은 후에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오늘날의 불가리아는 유구한 정교회권 국가이지만 여성의 노출에는 관대한지 [[톱리스]]로 선탠하는 여성들이 많다. [[스페인인]] 중에서도 톱리스 선탠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시절 악질 파시즘 정권에 유착했던 일부 막장 성직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에 대한 냉담 성향도 있는 반면, 불가리아는 불가리아 정교가 국민 정체성의 상징인데도 그러하다. 물론 과거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나체로 수영하는 것이 대세였던 [[동독]]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할 것 없다. 물론 구 공산권이 노출에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 인물 == * [[니나 도브레브]] * [[네비아나 블라디노바]] * [[네오피트]] *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디미터르 베르바토프]] * [[디미타르 이바노프|디미터르 이바노프]] * [[마리아 페트로바|마리야 페트로바]] * [[마린 페트코프]] * [[미할 스파소프 아슈미노프]] * [[바바 반가]] * [[바실 카잔지예프|바실 카잔지에프]] * [[발레리 보지노프]] * [[보리스 1세]] * [[보이코 보리소프]] * [[블라고이 이바노프]] * [[비앙카 파노바]] * [[시메온 대제]] * [[시메온 2세]] * [[스틸리얀 페트로프]] * [[아지스]] * [[이바일로]] * [[일리안 미찬스키]] * [[카트린 타세바]] * [[크룸]] *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 [[토도르 지프코프]] * [[판초 블라디게로프]] * [[필리프 필리포프]]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 관련 문서 == * [[남슬라브]] * [[불가리아계 미국인]] * [[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슬라브,version=366)] [[분류:유럽의 민족]][[분류:러시아의 민족]][[분류:남슬라브]][[분류:불가리아의 민족]][[분류:우크라이나의 민족]][[분류:루마니아의 민족]][[분류:몰도바의 민족]][[분류:튀르키예의 민족]][[분류:북마케도니아의 민족]][[분류:코소보의 민족]][[분류:불가리아-튀르키예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