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한고기 (문서 편집) [include(틀: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목차] [clearfix] == 개요 == '삼한고기(三韓古記)'는 '''[[한국]]의 [[한국사|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삼국사기]]에서 사료로 사용되었다. 저자나 작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책의 이름이나 남은 내용을 봤을 때 신라의 [[삼한일통|삼국통일]] 이후인 고려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원형'''이 담겨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저자 ==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의 [[조선시대]] 서적에 삼한고기를 신라의 안홍법사가 저술했다는 일설이 적혀있는데 당장 그 책에서도 그런 내용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럴리는 없다며 부정하고, 책의 저술 시기도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되므로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참고로, 안홍이라는 승려가 신라의 [[안함]]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역시 둘의 활동시기가 50년 정도 차이나고 '[[해동고승전]]'에서 그럴 가능성만을 제기한 것이므로 사실일 확률은 역시 낮다. == 상세 == === [[상고시대]] 기록 === > [[단군]]의 휘는 [[왕검]]이니, 《구사(舊史)》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신인(神人)이 [[태백산]][* 지금의 [[영변]](寧邊) [[묘향산]] <[[연려실기술]]의 주석>]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시니,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때는 [[요(삼황오제)|당요]](唐堯) 무진년이었다. [[상나라|상]](商) [[무정(상)|무정]](武丁)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본 이름은 궐산(闕山)이니, [[궁궐]] 터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발음이 늦추어져 구월산으로 잘못 불려졌다. 일설에는, ‘아사(阿斯)’란 [[방언]](方言)으로 구(九)이고, 달(達)은 방언으로 월(月)이니 ‘아사달’이란 9월의 방언이라고도 한다. <연려실기술의 주석>] 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 삼한고기(三韓古記) - >---- > 아들 [[부루#s-1]]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이 되었다. [[우(하나라)|우]](禹) 임금이 [[제후]]를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 삼한고기(三韓古記) - [* [[하나라|하]](夏) 우 임금 18년 갑술의 일이다. <연려실기술의 주석>] >----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 [[단군조선]]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면 《삼한고기》의 내용을 기재하기를 “옛날 환국(桓國) 제석(帝釋)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서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 하였는바 이를 [[환웅|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는데, 이때 [[웅녀|곰 한 마리]]가 항상 신웅(神雄)에게 빌어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원하므로 환웅이 영험한 쑥 한 묶음과 마늘 20개를 주자, 곰이 이것을 먹은 지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다. 그녀가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잉태하기를 축원하므로 신웅이 마침내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그녀와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壇君)이라 하였다. 당요(唐堯) 경인년에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만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마침내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수(壽)가 1908세였다.” 하였다. >----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삼한고기》의 내용을 인용하고 이르기를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날 즉위하였는데, 상나라 무정(武丁) 을미년에 이르러서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이 1048세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부루(扶婁)를 낳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다. 우(禹) 임금 때에 제후들을 도산(塗山)에 모이게 했을 때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했다.” 하였다. >---- >《약천집》 제29권 잡저(雜著) 동사변증(東史辨證) [[단군]]과 관련된 기록이 자세하게 나와있는데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과 유사한 점이 많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연]]이 단군신화를 기록하며 인용한 ''''고기(古記)''''가 바로 삼한고기일 것이라 추정된다.[* 李康來,<三國遺事 引用 古記의 性格>(≪三國史記 典據論≫, 民族社, 1996)] 실제로 약천집에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가 삼한고기라고 밝히며 그 내용을 인용하여 적고 있는데, 원문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정도가 미미하고 삼국유사의 오탈자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그대로 적고 있어 자신이 본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은 맞아 보인다.[* 다만, 삼국유사의 고기(古記)가 삼한고기라는 것은 책의 저자 '남구만'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 또한 약천집에서는 연려실기술에서 빠진 몇몇 부분이 더 보충되어 있는데, [[필원잡기]]에 있는 단군의 기록이 삼한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필원잡기에서는 단순히 '고기(古記)'에 기록되어 있다고만 표현한다. 이 외에도 《동전고(東典考)》,《문헌고략(文獻攷略)》,《명수지문(名數咫聞)》등의 책에 삼한고기에서 인용한 [[단군신화]]가 적혀있으나 앞서 나온 기록들과 내용면에서 차이는 없다. === [[삼국시대]] 기록 === >而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그런데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조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에서는 앞서서 인용된 중국 [[북송]]시대의 백과사전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백제왕 모도(牟都)가 480년과 490년에 [[남제]]와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과 이에 관련해서 받은 조서(詔書)를 부정한다. 그 근거로 삼한고기는 모도가 왕이 된 사실이 없다고 했음을 제시하고 있다. > 亦曰三韓古記 太祖大王 一云國祖王 >또한 《삼한고기》에서 이르기를 [[태조왕|태조대왕]] 또는 [[국조왕]]이라고 불렀다. >---- >《[[이재난고]]》제14권 二十四日壬寅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김부식]]이 달아놓은 주석을 보면 똑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김부식이 삼한고기의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 소실 ==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여러 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책이 전해졌다고 보여진다. 그게 맞다면 [[세조]]가 [[삼국사절요]] 편찬을 지시하며 사료로 이용하라고한 '고기류(古記類)'에 삼한고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삼한고기의 기록들은 과거의 서적[*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인용한 '고기(古記)'가 삼한고기와 동일서적이라는 저술자의 추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학설이 있다.[* 전남대 사학과 이강래 교수의 주장.] [[분류:한국의 역사책]][[분류:없어진 역사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