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사카 야스히코 (문서 편집) [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include(틀:신적강하)] ||<-2> '''초대 아사카노미야[br]제3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br]{{{+1 아사카 야스히코}}}[br]朝香鳩彦'''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야스히코 왕.jpg|width=100%]]}}} || || '''{{{#ffffff 구칭}}}'''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朝香宮鳩彦王) || ||<|2> '''출생''' ||[[1887년]] [[10월 20일]] || ||[[교토부]] [[교토시]] || ||<|2> '''사망''' ||[[1981년]] [[4월 12일]] (향년 93세) || ||[[시즈오카현]] [[아타미시]] || ||<|2> '''재임기간''' ||제3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1937년]] [[12월 2일]] ~ [[1938년]] [[2월 1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신위''' ||---[[왕]](王)--- → ([[황적이탈]]) || || '''경칭''' ||---전하(殿下)--- → ([[황적이탈]]) || || '''부모''' ||부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아사히코 친왕]](朝彦親王)[br]모친 츠노다 스가코(角田須賀子) || || '''형제자매''' ||9남 9녀 중 17째(8남) || || '''배우자''' ||노부코 내친왕[* [[메이지 천황]]의 제8황녀이다.](允子内親王) || || '''자녀''' ||2남 2녀)[br]나베시마 키쿠코(鍋島紀久子)[br]아사카 타카히코(朝香孚彦)[br]오토와 타다히코(音羽正彦)[br]오규 키요코(大給湛子) || || '''학력''' ||[[가쿠슈인]][br]도쿄육군지방유년학교[br]육군중앙유년학교[br][[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br][[육군대학교]][br]생시르 육군사관학교 || || '''종교''' ||[[신토]] → [[기독교]] {{{-1 ([[가톨릭]])}}} || ||<-2> '''군사 경력''' || ||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 (20기)}}} || ||<|2> '''복무''' ||[[일본 제국 육군]] || ||[[1908년]] ~ [[1945년]] || || '''최종 계급''' ||[[대장]] || || '''병과''' ||[[보병]] || || '''주요 보직''' ||[[근위사단|제1근위사단장]][br]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 '''참전''' ||[[제1차 세계대전]][br][[제2차 세계대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야스히코 왕 소쿠타이.jpg|width=100%]]}}}|| || '''[[소쿠타이|{{{#ffffff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야스히코 왕'''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구황족]]이며 [[중일전쟁]]에서 활약했던 군인. 대일본상이군인회(大日本傷痍軍人会)의 총재를 맡은 바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쇼와 덴노]](히로히토)에게는 36촌 고조할아버지뻘인 인물이며, 쇼와 덴노의 황후인 [[고준 황후]](나가코)의 숙부 중 하나. [[이방자]] 비에게도 숙부가 된다.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소노 사치코(園祥子)]]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쇼와 덴노]]의 고모부가 되기도 한다. 즉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고준 황후]]의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인 셈. == 초기 생애 == [[1887년]] [[10월 2일]]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측실 츠노다 스가코(角田須賀子)의 8남으로 출생했다. [[일본]]의 4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후손. 일본 황족 남자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 어릴 때는 황족과 [[화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다가 육군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하여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생시르, 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http://www.st-cyr.terre.defense.gouv.fr/|홈페이지]].]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프랑스 유학 당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나루히사 왕은 사망하고 야스히코 또한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1926년 대좌로 승진했다. 1930년에는 육군대학의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소장(계급)|소장]]으로 승진하여 제1근위사단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군사참의관이 되었는데, 이 자리는 [[쇼와 덴노]]에게 영향력 있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황도파의 과격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인 [[2.26 사건]]이 벌어지자, 아사카는 이를 지지하여 [[쇼와 덴노]]에게 쿠데타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으나, [[쇼와 덴노]]는 이를 거부하고 쿠데타 부대에게 원대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쇼와 덴노]]와 아사카노미야는 사이가 벌어졌고, 이후 1937년 아사카는 야전직으로 전출되어 [[상하이]] 파견군을 맡고 있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사령관 아래에서 근무하였다. == 중일전쟁 ==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대본영은 애초부터 對중국 전면전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상하이 이상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지만, 중지나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는 것이 필수라고 여겨서 독단적인 난징 공격을 실시했다. 이 때 야스히코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난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마쓰이는 일본군이 처음으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군대의 군기를 엄정히 유지할 것이며, 난징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난징에 [[일장기]]도 게양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대민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정상적인 방침을 세웠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마쓰이가 [[결핵]]에 걸려 몸져눕자 아사카가 사령관 대리로서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 전투|난징 공략]]을 지휘하였다.[* 여담이지만 [[장택상]]의 형인 장직상이 1937년 [[중일전쟁]]에 참가해 아사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대화에서 장직상은 "아사카를 만난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발언했다. 이후 장직상은 황기 2600년 봉축 행사에 참가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남선전기의 사장을 맡는 등 [[친일]] 행적 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여기서 이 장직상은 "[[한국]] 사람들이 지원병제를 실시하니 기뻐하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후 포로 학대와 민간인 공격 명령을 내렸다는 말도 있으나, 이 명령은 아사카가 직접 내렸다는 설도 있고, 조 이사무(長勇) 소장이 내렸다는 설도 있다. 결국 조 이사무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한 뒤 [[할복]] [[자살]]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태평양 전쟁]] 중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92px-Asakanomiya_yasuhiko.jpg|width=100%]]}}}|| || 1940년대 당시의 야스히코 || 1938년, 아사카는 본토로 돌아와 [[대본영]]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 후 군사 지휘는 맡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이 [[필리핀 해 해전]]과 [[사이판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자, [[제2차 세계대전]]과 삼국동맹을 주장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츠노다 도모시게를 중심으로 하여 아랫동생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말이 동생이지 아버지 아사히코 친왕이 워낙 늙어서까지도 정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고작 이 둘의 나이 차이는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동갑이긴 해도 야스히코가 더 일찍 태어났지만 말이다. 더불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역시 [[메이지 덴노]]의 내친왕이자 노부코의 여동생인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야스히코 왕과 나루히코 왕은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이 된다.], 쇼와 덴노의 동생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그리고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와 함께 [[도조 히데키]] 암살로 시작하여 막 나가는 군부 정권을 엎어버리는 [[쿠데타]]에 참여했다. 하지만 쿠데타의 과격성에 놀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실행하기 전에 자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물증도 딱히 없었고, 완전히 발각된 것도 아니라서 의혹이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쿠데타 참여자 중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책임자가 대충 묻어버린 탓에 [[상부#s-1|상부]]에 알려지지도 않아 쇼와 덴노는 그런 사실도 몰랐으며, 전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참여자들의 이력이 천황의 친동생들부터 친왕에 육군 대장 등 정말로 화려한데다가, 이미 군부 내에서도 도조 히데키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숙청 대상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다카히토 전하가 허락하셨으면 넌 죽었어!"라는 츠노다의 비웃음만 받고 끝났다.]. 웃긴 건 저기 쿠데타 암살 명단 중에 '''자신과 [[고노에 후미마로]]도 [[역관광|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은 황족이고 [[고노에 후미마로]]는 유명한 [[후지와라]] 씨족의 후예인 [[고노에]] 가문의 당대 당주라 대놓고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진짜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자신과 고노에 또한 '''100% [[숙청]] 확정'''이다. 오히려 그 덕분에 자기 목이 붙은 셈. 이쯤 되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자수한 게 본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1945년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하고 [[미국]]이 [[몰락 작전]]을 계획할 때 또 사고를 친다. 무언가 하니 '''[[결호작전]]'''과 육해군의 통합. 그러나 아사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더 이상의 항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쇼와 덴노와 일부 신료들의 결단[* 이중 쇼와 천황이 [[궁성사건]] 등 군부의 완고한 반발을 무릅쓰고 항복을 시인한 것을 일컬어 천황의 성단(聖斷)이라고 한다.]에 따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본 제국은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야스히코가 이런 개드립을 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이 자가 황도파라는 것이고, 내면적으로는 전후의 전범재판 기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복을 하지 않고 [[미군]]의 인명 피해를 계속 내 미군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간다면, 일본은 [[미국]]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본인은 죽음을 면한다. 즉, 지 목숨 구하려고 본인 백성들을 마치 전쟁터에 개 몰듯 몰아대서 포화에 갈아넣겠다는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으로서, 사실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본인밖에 모르는 치사한 인간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랬다고 하더라도 미군 수뇌부가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일본 제국 본토 침공에 대해 망설였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금상천황(今上天皇)으로 재위하던 [[쇼와 덴노]] 또한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잘 되어도 폐위되거나, 나아가서는 혹시라도 자국의 군주제가 폐지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불안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망한 군주제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몰아내고 연합군으로 전향해 1년 동안 이탈리아 내전을 치른 결과 무솔리니는 죽었음에도 국민투표에 따라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었다.[* 국민투표 결과는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여론이 갈려서 결과가 거진 반반이었다. 북부의 주된 여론이었던 왕실 폐지가 근소한 차이로 결국 이기게 되었지만, 만약 왕실 유지 측이 이겼다면 연합국이 굳이 왕실을 폐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루마니아 왕국]]은 종전 이전에 [[추축국]]에서 연합군으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 [[소련]]에게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에 왕가가 쫓겨나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쇼와 덴노는 황위를 유지하고 전후에도 재위했으며, 황실도 무사했다.[* 다만 대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덴노를 비롯한 [[일본 황실]]은 평범한 [[입헌군주제]]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위상이 비교적 낮아져버렸고, 일본 황실의 직궁가([[다이쇼 덴노]]의 직계후손)를 제외한 세습친왕가와 [[화족]]들도 전원 평민으로 전락했다([[신적강하]]). 이는 직궁가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었는데, 왜냐 하면 당시에도 직궁가는 그러잖아도 남계가 부족해서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와 직궁가를 배출한 [[간인노미야]], 특히 [[후시미노미야]]와 그 분가들로 남자들의 수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츠라노미야]]와 [[아리스가와노미야]]는 이미 대가 단절된 상태였다.][* 근데 사실 미군정은 전쟁 범죄 의혹이 있는 황족만 강등시키려고 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대거 강등된 이유는 황실의 큰어른 뻘이지만 이전부터 자신의 황족 신분을 싫어하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황족들에게 황적 이탈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아예 왕정이 폐지된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연합국이 강제로 폐지시킨 게 아니라 국민투표에 따라 결정된 것이고, 그 결과도 찬반이 거의 반반으로 갈렸기 때문에 '전후 추축국=군주제 폐지'라는 공식은 애초에 맞지 않다. [[태국]]도 추축국이었지만 왕실이 무사했다. 이처럼 전후 추축국 중 군주국의 공화국 전환은 소련 점령 지역이 아닌 이상 연합국의 강제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의향이 작용했고, 일본은 황실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이 전쟁 중에도 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국화와 칼]] 제2장의 내용에 따르면, 미군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의 진술서 중 천황을 비방하는 내용이 적힌 것은 단 '''세 통'''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본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힐 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심문 훈련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진짜 의견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러했다. 심지어는 그 세 통마저도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 건 한 통뿐이었다.] 황실은 그 영향력을 다행히 상당부 지켜냈다. == 전후 ==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이 아사카 야스히코[* 더이성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궁가인 '[[아사카노미야]]'는 평민들의 성처럼 그냥 '아사카'가 되었다. 당연히 왕 작위도 박탈.]를 전쟁 범죄 혐의로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에 기소를 한 것 때문에 그는 GHQ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의 일본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처분|불기소]] 방침에 따라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 황족을 기소할 경우 그들을 우러러보던 일본 사회가 반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 이러한 일본의 전범들 처벌 문제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사이가 크게 악화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공내전]]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1947년 8월 14일, 아사카의 가족들은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신적강하|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강등당하였다]]. 아사카의 가족들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동안 살고 있던 자택 또한 [[일본 정부]]에게 압류당하였다. 법적인 처벌은 면했지만 그래도 명예와 재산을 상당부 잃어버렸다. 아사카 일가의 저택은 이후 수상 관저로 잠시 쓰이다가 현재 도쿄도 정원미술관(東京都庭園美術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아사카와 그의 가족들은 [[시즈오카현]]의 [[아타미시]]의 별장으로 이주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okyo_Metropolitan_Teien_Art_Museum.jpg|width=100%]]}}}|| || 도쿄도 정원미술관 || [[1951년]]에 아들과 며느리, 기타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전후에는 골프를 주된 취미로 삼으면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골프 애호는 전쟁 이전에도 여전히 그대로여서, 예전부터 도쿄 골프 클럽(東京ゴルフ倶楽部[* 한자어 같지만 '클럽'의 외래어 표기인 쿠라부(クラブ)를 각 글자에 같은 독음의 한자를 대응시켜 만든 [[아테지]]이다.])의 명예 총재직을 맡기도 했을 정도이다. 이후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의 자택에서 계속 살다가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당연하지만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 == 가족 ==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 내친왕과 결혼, 2남 2녀를 낳았다. * 장녀 [[나베시마 기쿠코]] * 장남 [[아사카 다카히코]] * 차남 [[오토와 다다히코]] * 차녀 [[오규 기요코]] ===# 구황족 가계도 #=== [include(틀:일본 구황족 가계도)] [[분류:일본의 왕]][[분류:구황족]][[분류:일본 제국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887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분류:서출]][[분류:도쿄도 출신 인물]][[분류:일본의 가톨릭 신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