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여경 (문서 편집) [include(틀:송사)] ||<-2> {{{#ece5b6 '''{{{+1 북송의 대신[br]{{{+1 呂餘慶 | 여여경}}}}}}'''}}} || || '''{{{#fff 성씨}}}''' ||여(呂) || || '''{{{#fff 이름}}}''' ||윤(胤) || || '''{{{#fff 자}}}''' ||여경(餘慶) || || '''{{{#fff 부친}}}''' ||여기(呂琦) || || '''{{{#fff 조부}}}''' ||여연(呂兗) || || '''{{{#fff 형제}}}''' ||여단(呂端) || || '''{{{#fff 생몰}}}''' ||927년 ~ 976년[* 태조 조광윤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 || '''{{{#fff 출생}}}''' ||유주(幽州) 안차현(安次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인물. 본명은 여윤(呂胤)으로 자는 여경(餘慶)이지만,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 조광윤의 이름을 피휘하여 자를 사용하였다. == 생애 == 여여경은 유주(幽州) 안차현(安次縣) 출신으로, 927년에 여기(呂琦)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여경은 선대의 음보를 통해 천우비신(千牛備身)으로 보임되었고, 개봉부 참군, 호조연을 역임하였다. [[후진]]의 황제 [[석중귀]]의 아우인 석중예가 충무군(忠武軍) 절도사를 겸임하면서 여여경은 충무군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된다. 이후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에서 [[후주]]로 넘어가는 시기까지 여여경은 계속해서 관직에 있다가 다시 복주(濮州)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승진한다. 당시 동주(同州)에서 정국군(定國軍) 절도사로 있었던 조광윤은 여여경의 재간에 대해 듣고 조정에 여여경을 종사(從事)로 삼도록 상주하였다. 당시 황제였던 [[시영]]은 조광윤의 상주를 듣고 “설마 이전에 복주에서 규조(糾曹)[* 규조는 과거 녹사참군의 별칭이었다.]를 지냈던 그 사람이오?”라고 물었고 즉시 여여경을 정국군 장서기(掌書記)로 삼았다. 시영은 과거에 전연에 진수한 적이 있었고 당시 전연은 복주에 속했으며 여여경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후 조광윤이 활주(滑州), 허주(許州), 송주(宋州)의 절도사를 역임하면서 여여경은 조광윤의 막료가 되어 조광윤을 보좌한다. 960년,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이다. 여여경은 송주와 박주(亳州)에서 관찰판관을 맡았다가 조정의 소집을 받고 입조하여 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단명전 학사를 맡았다. 단명전 학사는 이전에 여여경의 아버지인 여기가 [[후당]] 시기에 한번 맡았던 적이 있었던 관직이었고 품계도 똑같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여여경의 집안을 영광으로 여겼다. 여여경은 얼마 안 있어 개봉부의 지부가 되었고, 태조가 노주(潞州)와 양주(揚州)를 정벌할 때마다 부유수를 맡았다. 962년에는 호부시랑을 맡았으며, 963년 송나라가 형호 지역을 평정한 뒤에는 지담주(知潭州)와 지양주(知襄州)를 맡았으며, 병부시랑, 지강릉부로 옮겼고 참지정사로 임명된다. 964년 [[후촉]]이 평정되자, 여여경은 지성도부로 임명되어 성도부에 부임한다. 당시 옛 후촉 땅은 송나라가 후촉을 평정한 이후로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후촉 정벌을 맡았던 왕전빈은 후촉 정벌 이후 군사들의 약탈을 방조하였다.[* 어떤 때는 한 군교가 술에 취해 칼을 빼들어 상인의 물건을 빼앗았다는 보고도 올라왔다고 한다.] 이에 여여경은 곧바로 약탈을 저지른 이들을 처형하여 성도부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았고 이부시랑이 더해졌다. 지성도부를 맡은 여여경은 조정으로 복귀하여 검남형남등도도제거사(劍南荊南等道都提擧使), 삼사수륙발운등사를 겸임하였다. 여여경은 973년 병에 걸려 조정에 자신을 기무에서 해임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상서좌승이 되었다. 여여경은 97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진남군(鎭南軍) 절도사로 추증되었다. 이후 여여경의 아우인 여단이 재상이 되자, 여여경은 다시 시중으로 추증되었다. == 여담 == 여여경은 중후하고 검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조광윤이 번진에 있을 때 항상 여여경을 보좌관으로 데리고 다녔다. 조보와 이처운이 먼저 임용되었을 때도 여여경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조보와 이처운이 각각 잘못을 저지르자 여여경은 이들을 변호하여 태조의 노여움을 풀도록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여여경의 이런 모습에 대해 근면성실하고 덕이 있는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27년 출생]][[분류:976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