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정기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전 국회의원, rd1=이정기(정치인), other2=동명의 이름을 개명 전에 쓴 축구선수, rd2=이정협, other3=동명의 군인, rd3=이정기(군인))] [include(틀:제(765)의 역대 국왕)] ---- || '''작위''' ||요양군왕(饒陽郡王)[* 이정기 당대에는 아직 왕을 자칭하지 못했다.] || || '''대표 직위'''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 || '''성씨''' ||이(李)[* [[당나라]]의 [[국성]]으로, 이정기가 [[대종(당)|대종]]에게 사성을 부탁해 받은 것이었다.] || || '''휘''' ||정기(正己) || || '''본명''' ||회옥(懷玉) || || '''생몰연도''' ||732년 ~ 781년 || || '''재위연도''' ||765년 ~ 78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yUVtVZULXZQ)] [[당나라]]의 [[절도사]]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으로, [[절도사]]가 되었다가 [[안사의 난]] 이후로 어지러워진 당나라 후기의 혼란을 틈타 [[산둥성|산동]] 지역에서 사실상 자립했다. [[고선지]]나 [[왕사례]], [[고문간]] 등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생애 == === 초기 일생 === 732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규모로 군집되어 있었던 [[당나라]]의 영주[* 오늘날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58년, [[안사의 난]] 당시에 [[평로]]절도사인 왕현지가 병사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이 절도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같은 고구려 유민이자 [[고종사촌]]형인 [[후희일]]을 평로절도사에 추대한 후 자신은 그 부장의 지위에 올라섰다. 이후 공격해오는 [[해족]]의 군대와 [[안녹산]]군을 피해 산동 지역의 청주를 점령하고, 청주 절도부까지 장악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정기는 젊은 나이에 무력이 상당하고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위구르]] 장수와 벌인 결투의 일화에서[*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이정기가 날린 주먹 한 방에 쓰러져 그만 오줌까지 지렸고, 이후로 쪽팔린 나머지 다시는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위구르 제국]]은 [[돌궐]]을 대신해 중앙아시아의 교역망을 장악했으며, 당 조정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했던 원군 요청을 빌미로 [[장안]]에까지 들어와 [[약탈]]을 저질렀다. 또한 연회에서 [[덕종(당)|당나라 황족]]에게 "너 내 앞에서 춤 한 번 춰 봐"라고 주정을 부리는데도 당 조정이 어떻게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쩔쩔매는 상대였다.]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러 활동에서 병사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이를 시기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제거하려고 하자 오히려 [[후희일]]이 역관광을 당했다. 그 결과 이정기는 병사들이 추대한 최초의 절도사가 되었다. === 세력가가 되다 === 절도사 취임 이후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산동]]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의 구축을 개시했으며 당 조정으로부터 절도사의 지위와 [[발해]], [[신라]] 양국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여 경제적인 부를 챙겼다. 원래 [[한중일]]간의 무역은 [[8세기]]까지는 공무역이 대세였지만 [[9세기]]에 들어 [[당나라|당]], [[신라]], [[일본]]의 [[왕권]]과 국가 장악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사무역 위주로 개편되었다. 이후 위박절도사 전승사가 기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안녹산]] 시절부터 절도사 자리에 올라 기반도 튼튼해서 이정기를 비롯한 주변 절도사들을 우습게 봤다. 그런데 이정기가 이를 토벌하여 세력을 강화했다. 전승사는 이후 기세가 꺾였고 이정기와 곧 [[정략결혼|결혼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정기는 이영요(李靈曜)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명분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하여, 5개 주를 추가로 획득해 '''15개 주에 달하는 산둥성 지역의 (당시하남) 최대의 [[절도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이영요 토벌이 중요했던 건 단순히 5개 주를 더 넓힌 것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대운하]]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까지 영토를 확장한 데 있었다. 이영요는 훗날 이정기가 보여주는 '''[[대운하]]를 끊고 당 황실를 협박하기'''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에 조정은 이정기의 힘을 빌려 하북과 하남 일대의 [[절도사]]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고, 이 일환으로 [[재상]]에 해당하는 [[삼공]]의 지위와 종성인 이씨를 하사했다. 이후 이정기는 발해의 법제와 세제를 받아들여 활용하고, 동시에 수도를 운주로 옮겨 당 조정을 위협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등 독립 세력으로서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파일:attachment/이정기/chichungbunjin.jpg|width=100%]]|| === 말년과 죽음 === 이후 779년, [[대종(당)|대종]](代宗)이 붕어하고 절도사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인 [[덕종(당)|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덕종이 절도사 세습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정기는 주변 절도사들과 함께 당 조정에 대향하는 '''4진의 난'''[* 치청 번진 + 성덕, 위박, 노룡 등 하북 3진]을 주도했다. 이때 이정기는 병력을 조주에 집중시켜 전면전을 벌인 끝에 대운하를 차단하여 당 조정을 위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이정기는 781년에 숨을 거두었고[* 재위: 765~781, 재위기간: 17년, 향년 50세] 이후 그의 아들인 [[이납]][* 재위: 781~793, 재위기간: 12년, 향년 35세]이 15주의 절도사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정기 사후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 조정에 투항함으로서 12주가 되었고, [[대운하]] 등은 다시 조정의 통솔로 돌아갔다. 이후 [[평로]]치청 번진은 지속적인 게릴라성 운하 진출 등으로 최대의 독립 번진이자 당 조정에 반항하는 하북 번진들의 핵심적인 축으로 [[후희일]] 때부터 치면 60년간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이씨 가문의 통치는 이정기 이후 이납, [[이사고]][* 재위: 793~807, 재위기간: 14년, 이납의 아들, 향년 38세], [[이사도]][* 재위: 807~819, 재위기간: 12년, 이사고의 배다른 동생]까지 4대 55년간 이어졌다. 결국 [[헌종(당)|헌종]]이 805년에 즉위하면서 삭번정책에 따라 토벌전을 펼쳐 나머지 3진을 멸하자 이씨 가문의 제나라(평로치청 번진) 역시 강경하게 나가 조정에 맞서게 되었다. 멸망 직전에 이사도는 하음창을 급습하고 재상 무원형을 암살하며 배도에게 중상에 입히는 등의 성과를 보였지만 결국 당 조정과 친당(親唐)파 [[절도사]], 그리고 [[신라]]의 [[김웅원]]이 지휘하는 지원군 30,000명의 연합공격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이사도의 반란은 819년 2월에 진압되었는데, 신라는 5개월 뒤인 819년 7월에야 구원군 파병 의사를 밝혔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실제로 출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젊은 시절의 [[장보고]] 등 당군 소속 신라인들은 별개로 이사도 토벌에 참여했다. 이때 [[장보고]]가 회서 번진의 오원제를 토벌한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서주의 무령절도사 이소의 휘하에서 소장으로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정기 일가는 일시적으로 '''[[제나라#s-7|제]]'''(齊)라는 명칭으로 독립국가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변 하북 번진들이 다같이 [[위나라|위]]나 [[조나라|조]], [[연나라|연]] 등의 국호를 내세워 독립국가를 세울 때, 행동을 같이한 것이라서 '''독립적인 '왕조' '''라기엔 좀 미흡한 구석이 많다. 더욱이 이는 이정기 때가 아닌 [[이납]] 때의 일이었다. 실제로 하북 번진들이 국호를 내세우는 걸 포기하자 '''제'''(齊)라는 국호를 내세우는 것도 금방 포기해 버렸다. == 평가 == 이처럼 당 제국의 동쪽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이정기는 [[고선지]], [[왕사례]]와 더불어 대표적인 [[고구려]] 유민 출신 고위 장교였으며, 동시에 산동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반(半) 독립국을 세우고, 당 조정에 도전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한편 정통성 확보의 명분으로 당나라의 종성인 이씨를 하사받는 등 이정기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지만, 그가 세운 치청 번진과 이후의 제 왕조는 [[발해]]와 [[고구려]] 등의 영향을 받은 문화와 법제, 관제, 세제를 이용하고 있어 어느 정도의 계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제나라#s-7|제(齊)나라]]가 55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정기의 능력이 아니라 바다 건너의 [[발해]]가 이정기와 그 가문의 뒤를 봐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도 많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대란을 어느 정도 진압했고 게다가 [[곽자의]]라는 불패의 [[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토벌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정기에게 발해가 중요 군사물자인 말을 대놓고 지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왕(발해)|무왕]] 시기 대둔산 전투와 등주성 전투에서 발해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던 당나라 입장에서는 한창 [[말갈족|말갈 부족]]들을 복속하며 잘나가던 발해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이정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 여담: 고려 태조 [[왕건]]과의 관계? === 최근에는 [[왕건]] 관련으로도 언급이 되고 있는데, [[동북공정]] 찬동론자들이 떠드는 <왕건 [[화교|중국계]] 설>을 팩트체크하다보면 이정기의 치청 번진 관련 사안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https://cafe.daum.net/shogun/1Db/8892|#]] 다만 해당 글의 개인 추정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이정기 가문과 왕건 가문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애초에 [[고려 왕조]]에서는 공식적으로 [[숙종(당)|당숙종]] 이형이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의 아버지라고 주장했으나, 이마저도 신빙성이 그리 높지 않다. 이 주장에 대한 의심은 당대에도 제기되어 [[원나라]]의 학자가 [[충선왕]]에게 >"고려 왕은 당숙종의 후예라고 했는데, 숙종이 조선(신라)에 가서 자식을 본 것이 말이 되냐?" 고 물었는데 옆에 있었던 민지라는 사람이 기록이 오기라며 당숙종이 아니라 [[선종(당)|당선종]]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당숙종은 8세기 초중엽의 사람이라 9세기 후반~10세기 초반의 태조 왕건과는 너무 먼 시간대에 있는 반면 당선종은 9세기 초중반 사람인데다가 워낙 제위 계승권이 멀어 젊을 적에는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이라 어거지를 쓰면 말은 되는지라 원나라 학자도 그럼 맞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고려]] 멸망 이후 세워진 [[조선]]에서 고려의 역사에 대해 편찬한《[[고려사]]》에서도 작제건이 당숙종 혹은 당선종의 후예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믿지 않았지만 일단 작제건의 조상에 대한 얘기가 워낙 없어서 일단 싣긴 했다. 다만 싣기만 했을 뿐 믿지는 않았기에 두 가지 설 모두 비판하는 논평을 같이 실었다.] == 같이보기 == * [[고문간]] * [[제나라#s-7]]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 ---- ||<-5> '''치청절도사''' || || 전임 [[후희일]] || ← || '''{{{#black 이정기}}}''' [br] 765년~781년 || → || 후임 [[이납]] || ||<-5> '''[[당나라|{{{#yellow 당 제국}}}]]''' '''[[사도|{{{#yellow 사도}}}]]''' || || 전임 [[곽자의]] || ← || '''{{{#yellow 이정기}}}''' [br] {{{#yellow 779년~781년}}} || → || 후임 [[이성(당)|이성]] || [각주] [[분류:732년 출생]][[분류:781년 사망]][[분류:차오양시 출신 인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한중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