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그리스 왕국 (문서 편집) [include(틀:헬레니즘)] [include(틀:인도의 역사)] ||||||<:> {{{+3 '''인도-그리스 왕국''' [br] '''Ινδοελληνικό βασίλειο'''}}}[br]{{{+3 '''𑀬𑀯𑀦'''}}}[br]''Yavana''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3px-%CE%99%CE%BD%CE%B4%CE%BF%CE%B5%CE%BB%CE%BB%CE%B7%CE%BD%CE%B9%CE%BA%CF%8C_%CE%B2%CE%B1%CF%83%CE%AF%CE%BB%CE%B5%CE%B9%CE%BF.svg.png]] || ||<:> 존속기간 ||||기원전 180년 ~ 기원후 10년 || ||<:> 주요 도시 ||||[[탁실라]] 등 || ||<:> 국가원수 ||||왕 || ||<:> 주요 국왕 ||||메난드로스(기원전 155년? ~ 기원전 130년) || ||<:>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 ||<:> [[종교]] ||||[[그리스 신화|그리스 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 ||<:> 종족 ||||[[그리스인]], [[인도아리아인]] || ||<:> 성립 이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박트리아 왕국]], [[마우리아 왕조]] || ||<:> 멸망 이후 ||||인도-파르티아, [[인도-스키타이]] || [목차] [clearfix] == 개요 ==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이룩한 [[헬레니즘 제국]]이 쇠퇴하면서 떨어져나간 [[박트리아]] 계열 [[그리스인]]들이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넘어와 세운 [[왕국]]들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 초까지 [[펀자브]]를 중심으로 존재했고 [[간다라]] 문화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메난드로스 사후 차츰 쇠퇴하여 서북 방면에서 몰려온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멸망했다. 인도-그리스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고대 [[인도인]]들로부터 [[그리스]]의 별칭인 '[[이오니아]]'(Ἰωνία)에서 유래한 '''요나'''(𑀬𑁄𑀦, Yoṇa) 또는 '''야바나'''(𑀬𑀯𑀦, Yavana)라고 불렸다. == 역사 == 본래 이 왕국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헬레니즘 제국]]에서 쪼개진 [[셀레우코스 제국]]의 [[속주]]들이었다. 그러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휘청거리면서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으로 쪼개지는데 [[박트리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겨두고 간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에우튀데모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1세 집권기 때 인도 서북지역을 넘어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마우리아 왕조]]를 몰아내고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 왕조는 에우크라티데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본거지인 박트리아 지역을 내주고 인도 서북지역으로 피신, 이곳에 피난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인도-그리스 왕국이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단순히 나라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 지역의 그리스 계열 왕국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탁실라]](Taxila), [[카피사]](Kapisa), 판차나다(Panchanada), 아라코시아(Arachosia), 푸슈칼라바티(Puskalavati), 사갈라(Sakala) 등이 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경 원래 자신들이 살던 지역에서 벗어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펀자브]]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인도에 처음 진출한 이들 [[그리스인]]들이 인도의 풍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을 인도-그리스인 또는 박트리아-그리스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이 인도화되면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통은 신•구 두 갈래로 갈리지게 된다. 인도-그리스 왕국의 힘이 가장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신화]]에서 [[비슈누]] 신의 성지인 파탈리푸트라와 인도 서북부 해안의 여러 도시들이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인도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이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이들 인도-그리스 왕국들은 본래 자신들이 믿던 [[그리스 신화]]를 주로 믿었는데 이중 사갈라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은, 《밀린다왕문경》(Milinda Panho)(=나선비구경)에 의하면 수준 높은 불교적 담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역사적 근거는 없다.[* 나선비구경은 역사적 대화를 엮은 책이 아니라, '가상인물' 나가세나와 '전설화된' 메난드로스를 내세운 '교리문답서'이다.[br][br]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와 같은 『나선비구경』의 내용은 형식적인 면에서조차도 ‘대론서’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밀린다와 나가세나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빌려 『나선비구경』이 성립할 당시에 불교교단의 안과 밖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교리적인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한곳에 모아 문답형식을 취해 풀어나간 일종의 논서(論書) 성격을 지닌 교리문답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호진,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62088480|『무아ㆍ윤회 문제의 연구』]], 불광출판사, 2015, ebook[br]{{{[}}}메난드로스는 그리스계-인도 군인 출신으로서 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밀린다빵하(Milindapañha)』를 일본어로 번역한 하야시마 교쇼{{{-2 (早島鏡正)}}} 역시 메난드로스를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고, 게다가 인도 문화권 밖에 있는 헬레니즘 문화권 가운데서 자란 그리스 왕”이라고 소개했다.{{{]}}}, 호진, 같은 책[br][br]같은 책에서 저자는 메난드로스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소문'으로 일축한다.] 인도-그리스 왕국의 인도 유입은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에서 주조한 화폐들이 이 시기에 많이 유입되어 후에 인도 역사의 연대를 규정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도-그리스인들은 자신들만의 [[금화]]를 주조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에 [[쿠샨 왕조]]에서 널리 성행하게 된다. 거기다 이들의 침입으로 인도 서북 지역에서는 간다라 양식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헬레니즘 문화]]가 성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인도-그리스 왕국들은 [[월지|월지인]]들에게 쫓겨온 소그디아나의 [[스키타이]]의 일파 [[사카족]]들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사카족들이 세운 [[인도-스키타이]]가 들어섰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서기 3, 4세기에도 야바나인[* 인도인이 그리스인을 불렀던 이름]의 정치집단이 확인되며, 9세기까지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주화에 그리스어를 기입한 사례가 존재한다. == 문화 ==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가 섞인 [[헬레니즘 문화]]가 성행했다. 이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작품이나 건축, 석굴상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통치자의 초상을 새긴 주화가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그리스인 장인들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통치, 행정 언어도 스키타이 왕국 시대까지는 그리스어로 남아서 이 시기에 인도를 여행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그리스어만 사용해서 육로로 여행할 수 있었다고 기록을 남겼을 정도이다. 그리스인들은 인도의 천문학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로 점성술을 뜻하는 “호라샤스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천문과 시간 관측을 뜻하는 “흐로스코포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헬레니즘 문화]] 문서를 참조. [[분류:그리스-인도 관계]][[분류:그리스-파키스탄 관계]][[분류:아시아의 왕국]][[분류:인도의 역사]][[분류:헬레니즘]][[분류:1세기 멸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