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춘화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사마진 황후)] ||<-2> '''{{{#ece5b6 서진의 추존 황후[br]{{{+1 宣穆皇后 | 선목황후}}}}}}''' || || '''[[시호|{{{#fff 시호}}}]]''' ||선목황후(宣穆皇后) || || '''{{{#fff 출생}}}''' ||189년 || || '''{{{#fff 사망}}}''' ||247년 4월 || || '''[[능묘|{{{#fff 능묘}}}]]''' ||고원릉(高原陵) || ||<^|1><-2><:>{{{#!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fff 성}}}''' ||장(張) || || '''[[휘|{{{#fff 휘}}}]]''' ||춘화(春華) || || '''{{{#fff 부모}}}''' ||부친 [[장왕]](張汪) ||}}}}}}}}} || [목차] [clearfix] == 개요 == [[위(삼국시대)|조위]]의 여성. 아버지는 [[장왕]][* 이름이 왕(汪)이다], 어머니는 하내 산씨이다.[* 죽림칠현인 [[산도(서진)|산도]]와 친척이다.] [[사마의]]의 아내이자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남양공주]]의 어머니이다. 사례 하내군 평고현 사람. == 생애 == 아버지 [[장왕]]은 조위의 속읍령(粟邑令)이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평균 이상이었다. 남편 사마의보다 10살 어렸으며, 어려서부터 덕행이 있었고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언제 사마의와 결혼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여종 살해 일화의 시기를 미루어 보면 아마도 1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마의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201년,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의 출사 제의를 거절했다. (《진서》 <선제기>) 사마의는 중풍에 걸렸다고 조조에게 거짓말을 치고 꾀병인 것을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진짜 병에 걸린 척하며 집 안에서 누워있었다. 마침 사마의는 밖에 책들을 말리려고 놓아둔 상태였는데[* 과거에는 책의 재료가 대나무인 관계로 [[책벌레]]나 [[곰팡이]] 등을 제거하기 위해 가끔씩 햇볕에 널어 말려야 했다. 이를 '거풍' 또는 '포쇄'라고 하는데 현재에도 과거에 전해지는 일부 고서(《[[조선왕조실록]]》 같은)를 대상으로 바람을 쐬고 햇볕에 말리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갑자기 비가 오자 책이 상할까 아까운 바람에 꾀병도 잊고 횡급히 나가서 밖의 책들을 걷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마의의 실수를 집안의 한 여종이 목격해버렸다. 201년 당시 장춘화의 나이는 겨우 13세 초딩이었는데, 남편의 꾀병이 혹시나 드러나지 못하도록 유일한 목격자인 그 여종을 '''죽여 버렸고''', 죽인 여종을 대신해서 직접 집안일을 했다. 사마의는 이를 계기로 장춘화를 무겁게 여기게 되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사마의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이것은 전근대 사회의 인권의식 수준이 현대 사회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당장 조조의 충성스러운 2인자이자 덕장이라고 불리던 하후돈도 장춘화와 비슷한 나이에 스승을 모독한 사람을 직접 죽여버린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오히려 의협심이 있다고 칭찬받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사마의가 냉혈한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시녀를 죽인 것에 경악했다기보다는 결단력으로 자신을 구한 것이 더 대견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타입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관이 이 사건을 어떻게 알았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유일한 목격자가 살해당한 이상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뿐일 텐데 당연히 당사자들이 이 사건을 자랑하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 훗날 조위가 저물고 사마씨의 시대가 된 뒤에 알려진 일화라고 본다면 가능하긴 하다. 208년, 20세의 나이에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를 초산했으며 그를 시작으로 사마의와의 사이에서 총 3남 1녀를 낳았다. 임신하기 힘든 40대에 [[사마간]]을 낳았으니 부부간의 금슬은 오래간 듯하다. --늙다리라고 비하하면서도 할 건 다 하냐-- 며느리 [[왕원희]]는 시부모를 섬기면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 (《진서》 <문명왕황후열전>) 사마의는 조조에게 출사하고 점차 승진하면서 본처 장춘화 말고도 첩을 3명[* [[복부인(서진)|복부인]], 장부인, [[백부인]].] 이상 더 두었다. 사마의는 첩들 중에서 [[백부인]]을 총애했고, 장춘화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었다. 사마의가 어느 날 병으로 눕게 되자 장춘화가 문병을 갔다. 하지만 사마의는 성의를 무시하며 "늙다리(老物)가 가증스럽구나! 어찌 성가시게 나타났는가!"라고 말했다. 장춘화는 사마의보다 10살이나 연하였는데, 사마의가 그녀를 늙었다고 여긴 것은 사마의의 다른 첩들은 훨씬 어렸다는 뜻이다. --불충에다 와이프까지 내팽개치는 윤리라고는 없는 남자 사마의-- ~~어쩌면 이때가 조상의 의심 피하려고 꾀병부린 때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진짜 사마의가 사악한 거다~~ 장춘화는 수치스럽고 분노해서 죽겠다며 [[단식]]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그녀의 자녀들도 함께 단식을 했다. 사마의는 깜짝 놀라서 사과했고 장춘화는 그제서야 단식을 그만두었다. 이후 사마의는 창피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늙다리가 어떻게 되든지 아쉬울 것이 없다. 다만 내 훌륭한 아들들이 잘못될까 걱정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 때문에 사마의가 [[공처가]]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247년 4월, 장춘화는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진서》 <선제기>) 남편보다 10세 연하에 4년 일찍 죽었으니 단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마의가 장수한 것이지 당시 기준으로서는 충분히 오래 살았으며, 장남 사마사가 상례를 치렀는데 지극히 정성을 다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진서》 <경제기>) 낙양의 고원릉에 장사지내졌고 광평현군(廣平縣君)으로 추증되었다. 장춘화가 죽고 2년이 지난 후, 사마씨 가문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조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264년, 아들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선목비'(宣穆妃)로 추봉되었다. '선'(宣)은 단지 남편 사마의의 시호를 따른 것이라 딱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시법에서 '목'(穆)은 성품이 좋다는 뜻이다. 어린 나이에 살인멸구를 시도한 냉혹한 면모와는 어울리지 않으나,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어머니였거나 혹은 실질적인 개국자의 배우자였던 만큼 성품이 훌륭했다고 포장을 해 주려는 의도였던 듯. 사마소는 장춘화의 외가 쪽 친척인 [[산도]]를 등용한 경력도 있었다. (《진서》 <산도열전>) 265년, 손자 [[사마염]]이 조위 [[조환|원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사마염은 할아버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존했고 할머니 장춘화도 선목황후(宣穆皇后)로 추존했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장춘화/기타 창작물)]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후비전의 등장인물)] [include(틀:진서)] [각주] [[분류:조의 인물]][[분류:서진의 황후]][[분류:189년 출생]][[분류:247년 사망]] [include(틀:포크됨2, title=장춘화, d=2022-07-08 22:36:4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