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보이쩌우 (문서 편집) ||<-2> '''{{{+1 판보이쩌우}}}[br]潘佩珠 | Phan Bội Châu'''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hanBoiChau_memory.jfif.jpg|width=100%]]}}} || ||<|2> '''출생''' ||[[1867년]] [[12월 26일]] || ||[[베트남]] [[응에안성]] 남 단 || ||<|2> '''사망''' ||[[1940년]] [[10월 29일]] (향년 72세)|| ||[[안남|안남 보호령]] 후에 || || '''직업''' ||독립운동가 || [목차] [clearfix] == 개요 == 판보이쩌우는 [[베트남]]의 근대화, 독립운동가이다. == 생애 == 1904년에 베트남 유신회를 결성을 주도하여 반프랑스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으로 근대문물을 배워 올 유학생을 파견하는 '동유운동'도 활발히 추진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외세를 이용한 독립,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비슷한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판보이쩌우는 초기에 [[아시아주의]]를 지지하였기에 일본을 호감있게봤었으나, 1910년대~20년대이후 일본제국의 본질을 간파하고는 이후로 반일주의자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 영향을 받아 무장투쟁 공화파로 돌아서며 중국 [[광저우]]에서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나간 1905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와 함께 베트남의 과거와 역사에 대해 만담을 나누었다. 만담의 내용은 훗날 편집되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책으로 출판되는데, 이것이 《[[월남망국사]]》이다. 월남망국사는 훗날 한국에 소개되어 당시 일본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한국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924년 상하이에서 프랑스 관헌에 체포, 하노이로 호송되어 프랑스정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민중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그를 [[후에]]시 교외에 종신가택연금 상태로 두었다. 죽기 얼마 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후에를 점령했지만 계속 연금상태로 두었고, 베트남이 독립하는것을 못본채 세상을 떴다. 사후에는 베트남 주요 도시 길거리에서 거리명칭이 붙어지는 등 베트남에서 애국지사로 평가받으나 현대 역사교육에서는 비중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호치민]]의 아버지 친구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있었지만 호치민이 외국에 나갔다가 다시 귀국하게 된것은 판보이쩌우가 죽은 뒤였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분류:베트남의 독립운동가]][[분류:응에안 성 출신 인물]][[분류:1867년 출생]][[분류:1940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