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퍼센트 합의 (문서 편집) [include(틀:영러관계 관련 문서)] [include(틀:냉전)] '''Percemtages Agreement'''([[영어]]) '''Соглашение о процентах'''([[러시아어]]) [[파일:퍼센트합의.jpg]]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간의 비밀 합의 노트. 남동유럽 유수 국가들의 미래가 단 2명과 하나의 메모지에서 정해졌다. [목차] == 개요 == 퍼센트 합의는 [[1944년]] 10월 제4차 모스크바 회담 중에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간 맺어진 비밀 비공식 합의다. 남동유럽 ([[발칸 반도]]) 국가들을 서방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면서 각 국가들마다 [[백분율|퍼센트]]로 분할하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 합의의 당사자는 아니었으나 모스크바 회담에서 본인을 대리하기 위해 주소 미국 대사인 아베렐 하리만을 보냈지만 하리만은 퍼센트 합의에서는 지속적으로 배재당하였고 추후 루즈벨트가 이 합의에 대해서 전해듣고서 합의안을 수용하였다. 이 비밀 합의 내용은 [[1953년]] 처칠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개되었다. 다만 소련은 [[1958년]]에야 이 합의가 존재하였음을 인정하였다가 다시 부정했다. 수많은 국가들의 미래가 두 사람이 메모를 두고 나눈 회담에서 결정되었다고 하면 이를 좋게 볼 일은 없었으니... == 배경 == === 영국의 배경 === [[윈스턴 처칠]]은 극렬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초강대국|더 강력해지고]] 동[[유럽]]에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주장할 것을 직시하였으며 이 전쟁으로 [[영국]]은 약해지고 미국에 더 종속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현실 중 처칠은 미국이 2차대전 이전처럼 [[고립주의]]로 회귀할 것을 우려했고 이에 보험삼아 소련으로부터 영국과 서방을 위해 남동유럽에서 최소한의 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더불어 [[인도 제국|인도]]를 비롯한 동방 [[식민지]]의 안정을 위해서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와 그곳으로 가는 항로의 안전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가 공산화되지 않는 것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테헤란 회담]]에서 영국이 제2전선 개전 위치로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탈리아 상륙]]을 주장한 이유기도 하다.] === [[1944년]]의 유럽 === [[1944년]] [[7월 22일]]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면서 중부집단군을 분쇄했고 루마니아로 진격하면서 [[발칸반도]]에 진입했다. 이에 [[루마니아 왕국]]의 왕 [[미하이 1세]]는 [[이온 안토네스쿠]]를 해임, 소련과 강화를 맺고 독일과 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독일군은 헝가리로 진주하여 소련과 단독 강화협상을 시도한 [[호르티 미클로시]]를 납치하고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을 옹립했으며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는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급변하는 발칸의 상황에 따라 동유럽의 미래에 대한 합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러한 합의로 이어졌다. == 합의 내용 == || 국가 || [[파일:소련 국기.svg|width=25]] 소련 영향력 || [[파일: 영국 국기.svg|width=25]] 영국 영향력 || || [[파일:불가리아 국기.svg|width=25]] 불가리아 || 75% → 80% || 25% → 20% || ||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width=25]] 그리스 || 10% || 90% || ||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width=25]] 헝가리 || 50% → 80% || 50% → 20% || || [[파일:루마니아 국기.svg|width=25]] 루마니아 || 90% → 100% || 10% → 0% || ||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5]] 유고슬라비아 || 50% || 50% || 회담 중 처칠이 메모에 영향권 분할을 숫자로 써서 스탈린에게 넘겼고 스탈린은 그 숫자들 중 동의하는 것들에는 ✓를, 그 외에는 자신히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분할 숫자를 덧쓰고 돌려줬다. 위의 표는 이의 내용을 나타낸다.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들은 처칠이 쓴 숫자에 스탈린이 동의한 경우, 화살표로 숫자의 변동이 있는 경우는 스탈린이 숫자를 바꾼 경우다. === 불가리아 === 4차 모스크바 회담 자체가 불가리아 문제에 관하여 성사되었기 때문에 불가리아 문제에 대해서 영국과 소련 간 어느정도 충돌이 존재하였다. 첫째로 영국은 불가리아의 국경이 [[1941년]] 이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전]으로 환원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소련이 [[친러]] 성향이 존재하는[* 불가리아는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불가리아의 확장을 용인할 것을 우려했다. 4차 모스크바 회담 직전까지 소련은 그리스에 거주하는 [[불가리아인]]들의 체류를 용인했는데 이는 처칠에게는 소련이 불가리아의 구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유지시키고 [[에게 해]][* [[지중해]]의 일부]로 진출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이 영향력을 원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로의 불가리아 확장을 경계했기 때문에 처칠은 불가리아가 루마니아로부터 얻은 남[[도브루자]]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새우지 않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지못미...] 따라서 소련은 불가리아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로의 확장은 되돌려질 것이라고 합의했다. 또 4차 모스크바 회담 당시에는 소련군이 불가리아로 진주하고 있던 상황인데 이에 따라 불가리아와 [[연합국]]간 맺어질 강화 협정도 논의에 올랐다. 소련은 루마니아와 맺어진 강화협정과 같이 불가리아에 세워질 연합국 관리 위원회(Allied Control Commission - ACC)는 소련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였으나 미국은 이에 반대하여 불가리아의 ACC는 미국, 영국과 소련의 합치된 명령에 따라 행동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스탈린은 영국이 소련의 강화안에 동의한다면 소련은 20%까지는 영국의 영향력을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추후 불가리아의 ACC는 소련 참모부의 명령을 받되 명령 프로세스에 미국과 영국 정부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 그리스 === 처칠은 [[유고슬라비아]]까지는 일부 양보가 가능해도 [[그리스]]만큼은 영국의 지중해 패권 유지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독점적 영향권 하에 놓기를 원한다고 스탈린에게 전했다. 스탈린은 처칠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했고 특히 영국이 2차대전 당시 지중해 재해 재공권을 잃으면서 겪은 애로 사항에 공감하여 처칠의 90:10 분할을 동의했다. 다만 스탈린은 처칠이 지중해 이권을 주장하여 그리스에서의 독점적 영향권을 주장한 것에 맞받아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 [[영국]]에 [[지중해]] 이권이 중요한 만큼 [[러시아]]에 [[흑해]] 이권이 중요하다. 여기에 이어 스탈린은 [[1936년]] [[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D%98%91%EC%9D%98_%EC%B2%B4%EC%A0%9C%EC%97%90_%EA%B4%80%ED%95%9C_%EB%AA%BD%ED%8A%B8%EB%A2%B0_%ED%98%91%EC%95%BD|몽트뢰 협약]]이 소련에 불리하게 맺어졌으며 소련은 터키 해협[* Turkish Straits.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일컫는 명칭이다.]에 독점적인 권한을 원한다고 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영국이 [[이집트]]의 의사에 반해 [[수에즈 운하]]를 점유하고 있는 것과 [[미국]]이 [[파나마]]의 의사와 상관없이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 운하 지대|점유하니]] 소련이 터키 해협에 권한을 얻는 것이 공평하다 덧붙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주장에 처칠은 동의하였으나 터키를 즉각 압박하여 이러한 권한을 얻어내는 것에는 우려를 표하였고 소련이 터키에 점진적인 압박을 가해 권한을 얻어내는 것은 묵인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스탈린도 [[소련군]]은 그리스에 진주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거기에 더해 영국은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공산당]]이 이끌던 그리스의 좌익 파르티잔 단체로 당대에는 그리스 내 가장 세력이 큰 무장조직이었다.]이 전후 그리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소련이 EAM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소련은 이때까지도 그리스 공산당에 대해 물적, 인적 지원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은 이미 EAM에 영국 군정에 협조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EAM은 이에 불복종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 요구도 문제 없이 수용했다. === 헝가리 === === 루마니아 === 처칠은 루마니아를 "러시아의 문제" (A Russian affair)라고 지칭하여 소련에 90% 영향력을 보장하였으며 소련이 루마니아와 맺은 강화 협정을 두둔했다. 루마니아는 그리스와 함께 이 퍼센트 합의에서 가장 잡음 없이 합의가 이뤄진 사례였다. === 유고슬라비아 === === 기타 === 부차적으로 미국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소련이 얻은 영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합의에서 스탈린과 처칠은 처칠이 소련의 팽창을 인정하는 한편 [[영국령 홍콩|홍콩]]을 비롯한 동방 식민지의 유지에 소련의 지지를 얻어냈다. == 영향 == 훗날 [[얄타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 퍼센트 합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창설될 [[국제연합]]에서 다시, 더 상세하게 다루자고 주장했고 이후 [[냉전]]의 개전으로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국가들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퍼센트 합의에서 논의된 국가들의 운명은 퍼센트 합의안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었다. 영국 영향력이 다수를 점한 그리스는 [[제1세계]]의 일부가 된 한편 영국-소련 영향력이 50:50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냉전에서 [[비동맹주의|중립]]을 취하게 되었고 그 외 소련 영향력이 다수를 점한 국가들은 그대로 [[동구권]]의 일부가 되었다. 처칠은 이 퍼센트 합의가 소련이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고 전략적 가치가 덜한 발칸 내륙국가들을 내주고 그리스가 서방 세계에 남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합의가 드러난 후 미국에서는 처칠이 국가들의 의사 없이 "[[https://ko.wikipedia.org/wiki/%EA%B6%8C%EB%A0%A5%EC%A0%95%EC%B9%98|권력정치]]"를 행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 여담 == * 처칠은 이 퍼센트 합의에서 쓴 메모를 두고 "The Naughty Document" (못된 문서)라고 불렀다고 한다. [[분류:1944년/사건사고]][[분류:냉전]][[분류:조약, 협약, 협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