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목황후 조씨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한 황후)] ||<-2> '''{{{#ece5b6 후한의 황후[br]{{{+1 獻穆皇后 | 헌목황후}}}}}}''' || || '''[[시호|{{{#ece5b6 시호}}}]]''' ||<(> 헌목황후(獻穆皇后) || || '''[[성씨|{{{#ece5b6 성씨}}}]]''' ||<(> 조(曹) || || '''[[휘|{{{#ece5b6 휘}}}]]''' ||<(> 절(節) || || '''{{{#ece5b6 출생}}}''' ||<(> 불명[* 생년은 일부 자료에서는 197년으로, 또 다른 문서들에서는 186년으로 나온다. 일각에서는 조조가 헌제에게 조절과, 그의 언니 조헌, 그리고 동생 조화를 함께 헌제에게 시집가게 하였는데 너무 어려서 귀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걸 보아 (확인 요함) 동생일 가능성이 높지만, 일부 창작물에서는 누나인 것처럼 각색되고 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보면 조비의 여동생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6년생이면 헌제와 혼인한 213년에 27세인데, 당시 기준으로 27세면 상당히 만혼이다. 조씨 3자매가 귀인으로 봉해지고 나서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궁을 1년 미뤘다는 서술을 믿는다면 조절이 186년생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조조의 딸이 20대 후반까지 미혼이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 || '''{{{#ece5b6 사망}}}''' ||<(> 260년 || ||<|2> '''{{{#ece5b6 재위}}}''' ||<:> '''{{{#fff 후한의 황후}}}''' || ||<:> 215년 ~ 220년 || || '''{{{#ece5b6 부군}}}''' ||<(> [[헌제]](獻帝) || || '''{{{#ece5b6 부친}}}''' ||<(> [[조조]](曹操) || [목차] [clearfix] == 개요 == [[헌제]]의 계후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후. 본명은 조절(曹節). 성까지 붙여 헌목조황후라고도 한다. 헌제가 산양공이 된 뒤에는 산양공부인으로 불렸다. [[조조]]의 둘째 딸로 [[조헌(후한)|조헌]], [[조화#s-2]], [[청하공주]], 안양공주, [[금향공주]] 등과는 자매. 참고로 자신의 고조부이자 조조의 증조부인 [[조절]]과 음과 [[한자]] 모두 같다. 조상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그 당시의 관습인 [[피휘]]를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다만 《예문유취》에서는 조절의 고조부인 조절의 이름을 조맹(曹萌)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위서와 예문유취 둘 중 하나가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절(節)자와 맹(萌)자가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옛날에는 전통적으로 부수 대 죽(竹/⺮)을 간단한 풀 초(艹)로 적는 경우가 많아서 節도 莭이라고 쓰는 경우가 흔해 萌과 헷갈리기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 조조가 삼공을 없애고 승상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황실을 껍데기만 남겨놓자 황제 측에서 외척을 동원해 조조에게 저항했는데,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나자 아예 자신이 직접 외척이 되어 황제파 친위세력이 생겨날 여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시집보낸 딸이다. 조씨를 위해 시집간 그녀는 끝까지 유협과 몰락한 후한 황실을 섬기며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 == [[삼국지(정사)|정사]] == 213년에 [[조조]]가 헌제에게 세 딸 [[조헌#s-3|조헌]], 조절, [[조화#s-2|조화]]를 바쳤고 이들은 모두 헌제의 후궁이 되어 궁에 들어갔다. 허나 아직 나이가 어려 위국에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렸다가 214년에 셋이 함께 귀인으로 승격되었고, 그 직후에 [[효헌황후 복씨|복 황후]]가 시해되자 215년에 조절이 새로운 황후가 되었다. 220년에 한나라가 망하고 [[조비#s-1|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사자를 보내 인수를 달라고 했다. 조절은 몇 차례나 성을 내면서 주지 않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결국 [[옥새]]를 난간 아래에 집어던지고 나서[*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킬 때 옥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가 옥새를 집어던졌던 것과 비슷한 사례다.]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서진|"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후한이 망할 때 후한 조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반항했던 사람이 후한을 사실상 멸망시킨 조조의 딸이자 조조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조조의 권력 싸움에 이용당한 딸이라는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자기 가족들이 자기를 해할 리가 없다는 어느 정도의 계산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후한의 마지막 충신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후한을 사실상 멸망시킨 사람의 딸이요, 선양받은 사람의 누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위가 숙연해졌다. 이후 위나라가 세워지고 헌제가 산양공으로 격하되자 그녀는 산양공 부인이 되었고, 223년 12월에 조비로부터 탕목읍을 하사받으면서 5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234년 남편 헌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도 25년 정도를 더 살다가 260년 6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조위의 황제였던 [[조환]]은 조절의 고종 조카였는데[* 즉 [[조조]]의 친손자다. 조조의 9남 [[조우#s-4]]의 아들. 그런데 조손간에 나이 차가 무려 '''91세'''.... 4대손이래도 믿을 나이 차이다. 조절은 그의 고모인데 거의 50살 차이가 난다.] 수레와 복장, 예의 등 모든 장례 절차를 한나라 황후의 예에 따라 진행시켰으며, 남편을 따라 선릉에 합장했다. "하늘이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라던 조절의 말은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황후 본인의 생전에 이미 [[폐후 장씨|위나라 황후]]와 [[조방|황제]]가 [[사마사|사마씨 권신]]에게 살해 및 폐위를 당하고, [[조모(삼국지)|그 뒤를 이은 황제]]는 아예 백주대낮에 [[사마소|권신]] [[가충|일파]]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등[* 일명 '''사마소 시군(사마소가 임금君을 시해하다弑)'''], 조위 사직은 후한 말 [[헌제]]가 당한 것 이상으로 비참한 수모들을 겪으며 망조가 단단히 들고 말았다. 조절은 이 기도 안 차는 꼴들을 모두 살아서 본 뒤 260년, 황제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자신의 조카가 실권이라곤 전혀 없는 꼭두각시 황제로 떠밀려 즉위한 바로 그 해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과 5년 뒤, 조위도 멸망한다. 후한이 멸망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삼국지연의|연의]] == 정사와 달리 오빠인 조비와 편을 먹고 헌제를 핍박하는 악인으로 등장한다. [[삼국지연의/피해자#s-5.14|실제 헌목황후의 행적을 고려하면 고인 모독 수준....]] 이후 [[삼국지연의]] 모종강본부터는 다시 정사의 묘사에 가깝게 회귀. 조비가 신하와 군사들을 보내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자, [[조홍]]과 [[조휴]]를 꾸짖고 조비를 비난하는 지조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헌목황후 조씨/기타 창작물)] == 둘러보기 == [include(틀:후한서)] [각주] [[분류:후한의 황후]][[분류:조위의 인물]][[분류:삼국시대(중국)/공주]][[분류:서출]][[분류:260년 사망]][[분류:조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