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도 (문단 편집) == 상세 == [[성종(고려)]] 14년(995)에 10도를 설치했다. 고려의 10도는 중국 당나라의 10도를 ~~복사 붙여넣기~~ 본받고 만들어졌다. 지방관제의 최고단위로서의 도제는 995년 9월 10도의 제정에서 비롯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지만 10도제의 많은 문제점은 그 성격에 대한 학설상의 논란을 가져오게 된다. 즉, 지방관제의 최고단위였으나 행정구획이 아닌 순찰 또는 감찰구획에 불과해 상주하는 장관은 없고 필요한 경우 수시로 중앙관을 파견해 그 구역을 순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 초기 관찰구역으로부터 시작했던 당의 도제랑 유사하다. 한편, 10도의 경우, 북방의 [[진]]을 제외하면 도 밑에는 [[주(행정구역)|주]], [[현(행정구역)|현]] 만이 설치된 셈인데, 그것은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해 주는 기준으로, 128개의 주는 북방의 진과 함께 지방관이 파견된 곳이고, 현은 ~~우리가 배워서 잘알듯이~~ 속현과 주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한 도의 장관을 [[관찰사]](觀察使)로 관할지역을 관찰사가 순찰했다. 그러다가 1005년([[목종(고려)|목종]] 8) 도단련사·단련사·[[자사]] 등과 함께 관찰사가 없어짐으로써 10도라는 행정구획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군사적 군정구역의 성격을 띄고 있던 5[[도호부]]와 12군[[절도사]]만이 남아 이것이 [[방백]](方伯)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에 반해 당나라 말기의 관찰사는 절도사와 단련사 사이의 외관으로서 당나라의 절도사 체제를 채용한 고려에서 관찰사를 10도의 장관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며, 전운사(轉運使)를 10도의 장관으로 보고 전운사가 없어지는 1029년(현종 20)까지 10도제가 존속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아울러 10도가 전국적인 지리적 구획이며, 장관인 전운사가 행정적으로 [[세금|조부]](租賦)를 전운하고, 백성의 소송을 청리(聽理)했지만, 10도는 중앙정부와 주군 사이의 행정구획이 아니라 단지 조부 전운의 방면을 표시하고, 지방순찰의 구획일 뿐, 지방행정의 중심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현의 외관들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1018년에 4도호·8[[목(행정구역)|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의 외관제가 성립된 뒤에는 주군과 유리된 10도의 의의는 더욱 감소되고, 마침내 현종 말년에 가서는 폐치되고 말았다. 하지만, 도제의 실시 이후에도 지방행정은 당나라의 생소한 ~~수입산~~ 도제보다 한국사회에 익숙해온 중요한 ~~국산~~ 12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10도제가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10도제 자체는 소멸했지만 지방관제의 최고단위로서 일단 수용된 도제는 종래의 주 중심의 지방관제와 절충하면서 새로운 모습의 도제로 전환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