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0년대 (문단 편집) === [[사회]] === ||[youtube(sp3mnJzHlMM)]|| ||<:>1980년대 대학가 || ||[youtube(p-0KpjtPMvU)]|| ||<:>1980년대 초 고속버스 안내양 멘트 || -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N47-pAnbHKShP4awiXFzzURBfMi7nZ5S|유튜브 'KBS 옛날티비' 채널 《그땐 그랬지》: 이십세기 708090 관찰기]]도 참고. * [[대졸|대학 졸업자]]들은 [[대기업]]에 [[취업]]이 잘 되고[* 물론 당시 대학진학률이 20%대에 불과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된다.] [[공무원]]의 경우에는 당시에는 그리 돈을 못 버는 직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실 이때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견기업]] 정도만 되어도 평생직장은 보장해주는 분위기였기에 공무원이 그리 메리트 있는 직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물론 공장 다니는 것이나 농사짓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지던 수준.] 시험경쟁률이 낮아서 하급 공무원이 되기 쉬웠다. 다만 그때도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행정고시]]의 경우에는 엘리트가 되기 수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은 건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물론 당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도 근로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참고로 [[공무원시험]]은 88년까지는 쉬웠으나 89년부터 취업률이 둔화되고 한국 경제가 예전만큼 시원찮치 못하게 되어 조금씩 어려워졌다. 91년 이후 만만치 않은 시험으로 어려워졌는데, 참고로 80년대 후반에 대학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안가고 7급이라도 시험 쳐서 들어갔다면 들어갔을 텐데 5~6년 만에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대기업도 대졸자라면 80년대에는 C-성적도 골라서 갈 수 있던 것을 91년 이후에는 성적이 B-이하라면 대기업 들어가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석유 가격도 80년대 중반부터 좀 안정화 되어서 [[마이카]]를 일단 사기만 하면 부담 없이 끌고 다니던 시기였다. * [[대학교]] 교육은 극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오늘날에는 최상위권이 아닌 이상 대학교를 나와도 우수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당시에 대학은 달랐다. 대학 문이 굉장히 좁아서 당시 대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수재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골라서 들어갔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 분위기는 70년대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4/5의 청년들은 '''주 6일 고강도 노동으로 저임금으로 굴려졌다.''' 경제 성장이 중요하던 때라 [[노동운동]]을 조직한다면 기업과 경제에 장애가 된다면서 금기시 되었다. 이 탓에 [[노동자]]의 권리라는 개념은 없었다. 열악한 환경 탓에 본인에게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했다. [[해고]]가 쉬워서 고용주의 권력이 강했다. 그 때문에 고용주가 무엇을 지시하던 노동자는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 근무 환경이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 [[개발도상국]] 시대였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두자릿수를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만큼 [[이자율]]도 높았다. [[대출]] 이자 또한 높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반인이 대출받기 까다로웠다. 지금의 [[사채]] 수준으로 대출 이자가 높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국민들은 자가보다는 [[임대]]나 [[월세]], 조금 사정이 좋으면 [[전세]]로 집을 구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세들어 사는 사람의 권리 같은 건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가 잦았다. [[재개발]]한다고 통보 받으면 그대로 집을 내주어야 했다. * [[의료보험]]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사보험 역시 전무했다. 혹여 일부 양심 없는 병원에서 사기를 치거나 터무니없는 진단을 내려서 비용을 뻥튀기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시대였다. 일반인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 같은 것은 부재했기 때문이다. 아프기라도 하면 비싼 병원비를 그대로 내야해서 상류층 이하의 사람들, 특히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집이 휘청거리는 위태로운 가정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상황은 80년대가 지속되면서 개선되었다. *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올림픽 개최에 따라서 시민을 학살한 독재정권이었다는 점을 희석시켜야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면이 있어서, [[통금]]이 해제되고, [[교복]]이 자율화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개인 [[과외]]가 금지됨에 따라 [[사교육]] 없이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세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몰래 할 사람은 다 하고 과외 가격만 올랐다.~~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란 명분으로 대학 정원도 급속하게 불어났는데, 이것이 결국엔-- 전두환의 의도와 달리-- 학생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졸업 못한 사람은 자퇴율 때문에 많지 않았다. * 대령으로 예편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된 [[오명(정치인)|오명]]의 전화 전전자교환기 도입 추진에 따라 1987년 [[시외전화|DDD]]가 전국에 깔리면서 재래식 전화의 현대화가 완료되었고, 이는 1990년대 [[PC통신]]과 [[삐삐]]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가는 기틀을 닦았다. * [[3S정책]]의 일환으로 <[[애마부인]]>을 위시한 [[에로영화]]들이 대거 제작되었고, 1988년 미국의 영화시장 개방 압력으로 직배가 허용되자 토종 영화인들이 반발해 시위까지 벌였다. ||[youtube(sTSdIiu_hyQ)]|| || 스포츠로 지배하라! 5공 3S 정책(프로야구) || [[K리그]]와 [[KBO 리그]], 민속[[씨름]]이 시작되는 등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야구]]에 있어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1980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한국에서 하기로 결정된 해이기도 하며, 1982년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지위를 알림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커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 유소년층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아지는 등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198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산아제한 정책]]이 제대로 약빨(...)을 받아서 신생아수가 1987년에 62만으로까지 떨어지기까지 했고 출생아수 70만을 다시 넘기려면 199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1996년부터 다시 60만대로 떨어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출산율 2명대를 더이상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1960년대생들이 성인이 된 시기다. *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컬러방송을 할려고 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다 같이 흑백방송 보자는 기존의 흑백TV 사용자들을 배려(?)한 정책 때문에 무산됐다. [[텔레비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네 번째로 늦게 컬러방송을 개시한 국가'''다. * [[1980년]] 코미디언 [[이주일]]이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모으고 배를 잡고 뒹굴게 만들었다. 가히 이주일 신드롬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주일의 데뷔는 컬러방송의 시작과 거의 일치한다. 80년대 중반부터는 KBS에서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등이 방영되며 콩트시대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컬러방송, 이주일, [[조용필]]은 당시의 연예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 이때부터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강남, 특히 [[송파구]]와 [[잠실]]이 더욱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었다. * 이때까지도 학교에 공공연히 금전을 주는 행위가 만연했다. 60년대, 70년대가 지난 뒤에도 일부에서는 가난 등의 이유로 돈을 가져오지 않는 학생이 얻어맞거나 반 수십명이 보는 앞에서 개쪽을 당했고, 아예 학교 밖으로 쫒겨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당국은 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점차 사라진다. * 어느 곳이든 [[권위주의]]가 굉장히 짙었다. [[국민학교]]마저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바로 폭력으로 응징당했다. 80년대에는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생각도 못하던 시대여서,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몽둥이 찜질을 당해도 그냥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 인권의식이 아직도 열악한 시기였다.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의 시대로, 범죄자뿐 아니라 길거리에 나뒹굴던 죄 없는 술고래들이나 노숙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몸이고 정신이고 망가지기도 했다. 할당을 정해주고 무작정 다 채우라고 강요하던 시대여서, 경찰들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좀 불량해 보이는 사람이면 족족 잡아넣기 바빴던 탓이다. * [[남아선호사상]],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관념이 여전히 통념이던 시절이라 [[여성]]들의 경우 능력을 갖추고도 대학에 가지 않거나, 집안의 반대로 가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로 공장으로 취업하거나, 아니면 시집을 가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오늘날에는 남자, 여자 모두 기술, 가정을 다 배우나 당시에는 남자에게는 기술을, 여자에게는 가정을 교육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등 교육은 자식 모두보다 주로 장남에게 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고, 딸이나 다른 아들은 대부분 [[중졸]]이나 [[고졸]]로 학업을 마감했고, 잘해봤자 [[전문대]]를 다니는 것이 최대였다. 이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 미숙련 사무직, 공무원으로 흩어졌다. * [[출산율]]의 경우 1982년까지 출산율 2.1명 이상으로 대체출산율 이상을 유지했으며 출생아 수도 80면명대를 기록해서 70년대 중후반의 추이가 이어졌으나,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으로 1983년에는 출산율 2.06명으로 대체출산율을 약간 밑돌고 출생아 수도 76만명을 기록하더니, 1984년에는 출산율 1.74명으로 1명대로 진입하고 출생아 수도 60만명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1984년~1990년의 출산율과 출생아 수는 1991년~1997년보다도 낮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출산율을 보였다. 자세한 사항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문서를 참고. 다만 아직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하지는 않았고, 출생아 수는 60만명대를 유지해서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수치였기에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시기였다. --[[신데렐라]] 노래에 뜬금없이 1980년대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