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6년 (문단 편집) == 개헌정국과 한파정국, 1986년 == 1985년 2.12 총선으로 돌풍을 일으킨 선명 야당 신한민주당은 직선개헌을 위해 1천만 개헌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정당은 현행 헌법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최선의 것이라 주장하여 아예 국회에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민당 측은 국회 밖으로 뛰쳐나와서라도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노라고 밝혔다. 신민당은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대도시의 개헌 현판식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모처럼의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자 그 동안 억눌려 온 국민들의 정치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대회를 시작으로 3월 23일 부산, 4월 5일 대구, 4월 19일 대전, 5월 3일 인천, 5월 10일 마산, 5월 31일 전주 등의 순서로 계획이 진행되어 갔다. 이후 3월 17일에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김영삼]]-[[김대중]] 양김, [[문익환]] 민통련 의장, [[박형규(목사)|박형규]] 목사, 이돈명 등이 회동해 신민당과 재야가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이하 민국련)'을 만들어 개헌 투쟁에서 공동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이렇게 개헌 현판식의 대성황과 야당과 재야의 보조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 열기를 더해가자 전두환 대통령은 4월 30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건의하면 임기 중에 개헌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정치적 발언으로서 야당을 국회 안으로 끌어들여 국민과의 연대를 차단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게다가 그 개헌안도 내각제 개헌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인천대회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날 인천시민회관 일대에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의 운동권 인사들이 모여들어 경찰과 투석전을 다섯 시간이나 벌여 인천에서의 개헌대회는 무산되었다([[인천 5.3 운동]]). 이 사건 이후 야당은 제도권 안에서 집권세력과 타협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운동권 세력에겐 혹독한 탄압이 가해졌다. 대표적으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0.28 건대항쟁]], 서노련 사건, ML당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민통련 사무실 폐쇄, 서울개헌대회 봉쇄 등이 있었으며 [[금강산댐]] 수공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등의 대중조작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정국이 얼어붙는 와중에 12월 24일 신민당에서 7개의 민주화조치를 선행하면 내각제를 받아들이자는 식의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정국이 더 꼬일 대로 꼬여갔다. 여담이지만 이른바 '한파정국'이라는 표현답게 1986년 1~2월은 [[한파]]가 찾아왔다. 1월 5일 서울 최저기온 '''-19.2 °C''' 최고기온조차 '''-13.1 °C'''로 매우 추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