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2년 (문단 편집) == 설명 == || [youtube(rktMoi4OTao)] || [youtube(UTQlMotg7Lg)] || || KBS 영상실록 2002년 대한민국 제1편: 월드컵신화를 만들다 || KBS 영상실록 2002년 대한민국 제2편: 국민참여 정치를 바꾸다 || * 연합뉴스 선정 2002년 10대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01&aid=0000287854|국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287627|해외]] 21세기 첫 대규모 행사가 열린 해이다. 200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년도인 2002년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1988년]]과 함께 상징과도 같은 해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이기도 하면서 열정과 흥분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현재까지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손에 가장 꼽히는 한 해로 2002년이 무조건 언급될 정도. 한국에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한일월드컵]]'''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부산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방 선거]][* 투표율은 월드컵 때문에 역대 최저였다. 물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그 다음 지방 선거도...]]]와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이땐 [[노무현]] 열풍과 대선 후보 단일화 문제, 현직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의 가족 문제 등 임기말 김대중 정권의 2002년 정치권도 월드컵 다음으로 화젯거리였다.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대선은 새천년민주당이 각각 반씩 승리했는데, 특히 16대 대선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지만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경선대회가 3월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이래 선거 끝날 때까지 흥분과 이변으로 가득 찼다. 특히 당시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도 큰 존재감이 없던 [[노무현]]의 급부상이 결정적이었다.[* 노무현이 처음 대선 출마를 선언한 2001년 12월까지만 해도 그의 지지율은 고작 '''2%'''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경험이 있고 정치경력이 많은 [[이인제]]가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여겨졌지만, 국민경선에서 노무현이 돌풍을 일으키며 결국 이인제는 중도하차하고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 노무현의 경선 과정은 현재까지도 정치드라마로 불리며 종종 회자된다.[* 이인제는 대선후보 경선 8개월 후인 2002년 12월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했는데, 이 때문에 이인제의 철새 이미지는 더욱 확고히 자리잡히고 말았다.]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후 후보가 되었지만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서 패하는 등 노무현에게는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회창]]에게 지지율이 밀리며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자 노무현은 당시 월드컵으로 순식간에 대선 유력주자로 올라선 [[국민통합21]]의 [[정몽준]]과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투표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밤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하며 위기가 닥쳐왔지만, 정몽준의 지지 철회가 오히려 진보진영 지지자들의 결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노무현은 이회창을 상대로 57만 표 차이의 '''극적인 당선에 성공한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희망돼지 같은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 때문에 노무현은 선거사상 최소 비용으로 당선된 후보가 되었다.] 선거를 이끌었으며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모이며 큰 역할을 해냈다. [[서프라이즈]]나 [[개혁국민정당]], [[PC통신]]의 [[나우누리]] 정치 게시판 등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3김 시대로 칭해지던 대한민국 구 정치 세력과의 세대교체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실제 대선 2년 후인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3김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김종필]]이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동교동계]]가 해체되면서 3김 시대는 완전히 대한민국 정계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듯이, 정치적으론 이용호 게이트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사건(홍삼게이트)이 터져 김대중 정부를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었고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월드컵을 이유로 긍정적인 해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만 출산율 1.18명을 기록하여 [[대한민국]]이 최초로 출산율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한 해이기도 하다. 출생아 수 또한 최초로 40만명대로 진입했다. 이후 2016년까지 15년간 출산율 1.1~1.2명대, 출생아 수 40만명대가 유지되어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점이 된 해이다. 이듬 해 정부는 출산장려정책을 도입하여 출산율 상승에 애를 썼지만, 2017년부터는 이 40만명대도 무너져 인구 절벽으로 인한 여러 사회적 문제가 부상하고 있는 상태다. 사회적으론 월드컵 열기로 인해 젊은 남녀들이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잦아 10대 [[성폭행]] 비율도 가장 높았던 해이며, 월드컵 기간으로부터 약 10개월 뒤인 2003년 3~4월에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인 저출산 기조를 막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소폭 상승에 그쳤다. 결과적으로는 2003년 전체 출생아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0월에는 서울지검에서 범죄 혐의자가 [[물고문]]으로 숨져 현직 검사가 구속되고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는데,[* 물고문을 했던 검사는 홍경령 검사(연수원 21기)였고, 지휘계통에서 홍 검사의 상관이었던 서울지검 3차장인 정현태(연수원 10기) 검사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까지 사표를 쓴 마당인지라 검사장 승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정 차장검사는 알짜보직에서 해임되고, 고검으로 내쫓겼으며 사실상 권고사직 수준이다. 이후 15년을 더 고검에서 재직하다가 2017년에 정년퇴직했다.] 그것도 군사독재가 아닌 민주국가에서 벌어진 터라 충격을 주었다. 날씨 상황의 경우 가히 최악이라 볼 수 있는 해인데 일조시간이 기록적으로 적어서 서울의 경우 거의 1년 내내 [[납량]]이 이어졌고 사상 최악의 황사가 발생한 해다.[* 발생일수는 전년도인 2001년보다 적은 16회지만 역대 두 번째로 많이 발생했던 해다. 하지만 피해, 정도가 사상 최악의 황사였다. 국내산업 전체가 크게 피해를 입었고, 학교도 휴교령이 떨어졌다. 누런 황사에 뒤덮힌 세상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고 현격하게 떨어진 가시거리 때문에 국내선 항공이 결항되고, 길거리 노점상과 상인들은 장사를 포기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해부터 황사 경보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 해에는 김해시에 큰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중국 여객기 추락 사고, 김해 한림면 수해 등. 다음해인 2003년에는 대구광역시에서 태풍 매미 상륙, [[대구 지하철 참사]] 등 큰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KBO 리그|프로야구]]는 사상 최저 관중을 기록하여[* 한 경기 당 최저 관중도 이 때 깨졌다.] 엄청난 불황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LG 트윈스]]가 준PO를 시작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는 돌풍을 일으켰고, 21시즌 간 [[KBO 한국시리즈]] 한정 [[콩라인]]에 묶여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가 9회 말 [[이승엽]], [[마해영]]의 드라마틱한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극적으로 [[콩라인]]에 탈출함과 동시에 염원이던 창단 첫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화제가 됐다. 그 전에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가 [[서울 SK 나이츠]]를 꺾고 프로농구 우승을 차지하면서, 2002년은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스포츠 팀 2개가 우승한 해이기도 하다.'''[* 준우승한 팀은 모두 [[서울특별시|서울]] 연고 팀이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가나 싶더니 [[제2연평해전]]으로 남북관계가 순식간에 경직되었으며, 2~3년 전 노근리 학살사건, 매향리 사격장 파동에 이어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와 [[김동성]] 선수 간 논란과 [[미선이 효순이 사건|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또다시 폭발했다. 그리고 이 반미 정서는 12월 촛불집회에서 절정을 이뤄 2003년 봄까지 계속됐으며, 현대사학계의 원로 [[서중석]] 교수는 2005년 저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미군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에 대해서 '휴머니즘의 발로이자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라 평했다. 국제적으로는 일단 [[2001년|작년]]의 [[9.11 테러]]로 인하여 전세계가 계속 [[테러]]의 위협에 떨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조지 W. 부시]]가 이 해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무자비한 테러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전세계에 표명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핵개발|북핵]] 위협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기도 한 해였다. [[북한]]이 [[IAEA]] 사찰단 전원 추방을 결정하고 핵시설 재가동화를 공식화하고, 제2차 연평해전을 터뜨려 전쟁 직전으로 갈 뻔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화해/협력노선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때 남북한 동시입장 등으로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부시가 타도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담 후세인]]은 같은 해 10월 대선에서 100%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다음 해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다만 당시에는 북핵위기보다는 오히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의 영향으로 [[반미]]가 부각되어 2000년대 초반의 반미감정이 절정에 이른 해였다. [[2000 남북정상회담]]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좋았던 점도 있다. 테러 위협과 북핵 등으로 인하여 증시, 유가, 달러에 금값까지 떨어지는 그 경제 불황 속에서도 전세계 주택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증시 침체 여파로 주식을 버린 투자자들이 주택 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주택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로 저금리 정책과 마구잡이식 부동산규제 완화 때문에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22.5%, 전국은 16.4%나 상승했다. 2001년부터 지상파 4사에서 시작된 '''[[HD]] 방송'''은 2002년부터 본방송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첫 스타트는 SBS에서 2002년에 방영된 [[대망(SBS)|대망]]부터, MBC는 2003년 [[다모(드라마)|다모]]부터, KBS는 2004년 [[해신(드라마)|해신]]부터 도입되었다.] 가요순위 등 일부 프로그램이 HD로 제작된다.[* 2002년 당시 HD로 방송되던 프로그램은 <[[SBS 인기가요]]>, <[[생방송 음악캠프]]>, <[[열린음악회]]>, <[[도전 1000곡]]>, <생방송 행복찾기>, <행복채널>, <아침마당> 등.] 특히 [[SBS]]의 경우 [[2002 한일월드컵]] 주요 경기를 '''[[HD]] 방송으로 생중계'''해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략을 구사하였고, 화면 품질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도가 매우 좋아서 월드컵 이후 한국 대표팀의 HD 방송 중계영상을 [[DVD]]판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HD 방송은 시작됐어도 정작 HD 방송을 볼 수 있는 HDTV 보급율은 단 '''2%'''에 불과해 HD 방송의 의미가 많이 없었다.[* 현재 선명한 화질로 나오는 유튜브에 인기가요나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보정하거나 방송국에서 구해왔거나 개인이 DVR로 녹화한 자료로,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파일들은 방송을 녹화한 것이다.] 홍보하려는 노력이 적었고 이 당시까지만 해도 디지털 TV의 가격이 상당히 비싼 데다가[*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ATSC|미국식 방식]] 대신에 [[DVB|유럽식 방식]]으로 쓰자고 제안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일단 당시 기준으로는 유럽식 디지털 TV의 가격이 미국식 디지털 TV에 비해 가격이 싼 데다 화질이 상당히 떨어지기는 했어도 다채널 구현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동방식도 미국식에 비해 우월했기에 그랬던 것.][* 당시 TV가격은 아날로그<[[HD Ready]](분리형)<내장형 순으로 비쌌다.] 1980년대 초반처럼 아예 흑백에서 컬러로 볼 수 있는 식이 아니고 채널도 더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화질이 좋다는 점 정도라서 메리트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일한 다채널 방송은 디지털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뿐이였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투명드래곤]]이 연재되고 [[긴급조치 19호]], [[아유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충무로의 재앙급 영화가 나타나는 등 문화계에 있어서 풍성한 한 해이기도 하다. [[영화]] 부문에서는 전세계적으로 '''호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파이더맨]],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 [[맨 인 블랙]],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등 초대형 블록버스터의 속편 등이 이 해에 몰아서 나왔다. 덕분에 전세계 영화 관련 매출은 [[2001년]] 643억 달러에서 11.8% 증가한 719억 달러로 당시 역대 최대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세계 영화시장규모, 2006)] [[드라마]] 부문에서는 배우 [[장서희]]의 출세작인 [[인어 아가씨]]가 6월 24일부터 MBC에서 방영되었고,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야인시대]]가 7월 29일부터 SBS에서 방영이 시작되었다. 2002년 상반기가 [[월드컵]] 열풍이라면 하반기는 [[인어 아가씨]]와 [[야인시대]]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장서희]]는 2002년 [[인어 아가씨]]를 통해서 엄청난 연기력으로 열연을 펼치면서 시청자들이 복수극에 몰입도를 높이게 만들면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고, 여기서 장서희가 열연을 한 역할인 주인공 '은아리영'의 각종 대사들도 이해에 여러차례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으며, 그 해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까지 수상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녀는 복수극의 달인이 되어버린다. [[야인시대]]는 드라마의 주 배경이 바로 청년 [[김두한]]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이다. 당시 2002년도는 월드컵 여파로 인해 국민들이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야인시대가 이러한 애국심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인시대에서 유행하는 패션 또한 화제였다. 중절모와 트랜치코트 등등 모든 백화점이나 매장에 가면 손쉽게 볼 수가 있었으며, 김두한을 다룬 학습만화책들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야인시대 놀이가 유행되어 많은 우려도 남기기도 하였고, "긴또깡", "오야붕" 등등 많은 유행어 또한 화제였다. 또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청년 김두한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던 [[안재모]]는 2002년 하반기에 최고의 스타로 떠올라 2002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 쾌거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배우보다는 잘 부각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동근]]도 [[이미연(배우)|이미연]]에서 [[최명길(배우)|최명길]]로 극 도중에 배우가 교체되면서 큰 좌초를 겪고 있었던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정말 열연을 보여주면서 그 해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한다. [[게임]]계에서는 시장 전체적으로 희비가 엇갈린 모습,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이슈들이 있었다. 먼저, 1980 ~ 1990년대에 흥했던 [[오락실]] 게임 시장에서는 2000년을 정점[* [[비트매니아]]의 국내판인 [[비트스테이지]], [[댄스 댄스 레볼루션]], [[펌프 잇 업]], [[EZ2DJ]]같은 [[리듬 게임]] 열풍의 공이 컸다. 특히 펌프 잇 업이 가장 흥행해서 펌프 잇 업으로만 구성된 오락실인 펌프방이 성행했을 정도.]으로 규모가 감소되어 왔는데 이 해부터는 아예 사양 산업으로 전락됨으로써 일부 오락실들만 살아남고 나머지 수많은 동네 오락실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다만, 소형 기체 형태의 [[문방구 게임기]] 덕분에 장소는 달라도 동전 넣고 [[조이스틱]]과 버튼으로 게임을 즐기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문화만큼은 [[바다이야기]] 사태가 발생했던 [[2006년]]까지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2000년부터 국산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온라인 게임|온라인 기반의 PC 게임]] 시장은 더욱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수많은 게임 개발 업체들이 너도 나도 온라인 기반 PC 게임에 도전하는 경향은 여전했다. [[악튜러스]]를 개발했던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 온라인]], 2002년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수상받은 SD EnterNET의 [[네이비필드]], [[드래곤플라이]]의 [[카르마 온라인]], [[천하제일상 거상|임진록 온라인 거상]], [[아스가르드(게임)|아스가르드]] 등이 정식서비스에 돌입했으며 [[테일즈위버]]의 오픈 베타 서비스도 실시했다. 그 해 연말에는 [[마비노기]]의 제작 발표가 공개되어 많은 사용자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패키지 게임|패키지 기반의 PC 게임]]은 2002년 7월 3일에 출시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워크래프트 3]]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 해를 기점으로 국산 패키지 PC 게임 시장은 뚜렷한 명작을 내놓지 못 하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를 겪었던 가정용 [[콘솔 게임]] 시장에서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해였는데 2002년 2월 22일에 [[CD]] 및 [[DVD]]를 매체로 하는 [[플레이스테이션 2]]가 국내에 정식 발매됨으로써 8년에 가까운 침체기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년 12월에는 [[게임큐브]], [[엑스박스]]도 정식 발매되었고, 특히 [[PS2]] 타이틀들은 액션, RPG, 레이싱 등 다양한 타이틀들이 선보이면서 [[철권 4]], [[메탈기어 솔리드 2]], [[귀무자 시리즈|귀무자 2]], [[진삼국무쌍 2]] 같은 인기 타이틀의 자막 한국어화 혹은 한국어 음성 [[더빙]] 혹은 [[파이널 판타지 10]]과 같은 대작 타이틀에 당시 최고 인기가수 중 한 명이었던 [[이수영(가수)|이수영]]의 [[얼마나 좋을까]]의 한국어 번안판 발표 등 현지화 작업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그 해 [[도쿄 게임쇼]]에서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를 3대 콘솔 타이틀로 만들 것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개발은 중단된 상태. e스포츠 쪽에서는 먼저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부터 [[전용준]] 캐스터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엄전김]] 중계진 조합이 완성되고 이는 [[옥션 올킬 스타리그 2012]]까지 유지된다. 또한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에 묻혀버리면서 역대 스타리그 결승전 최저 관중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실패한[* 심지어 이 대회의 흥행 실패로 [[변길섭]]의 우승 경력과 [[강도경]]의 준우승 경력도 덩달아 묻히게 되었다.] 반면에 다음 시즌인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임요환]]의 전승 우승이냐, [[박정석]]의 [[가을의 전설(스타리그)|가을의 전설]]이냐?'라는 떡밥이 제대로 흥하면서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결승전 관중이 공식 2만 5천명으로 스타리그 최다 관중 1위 기록을 세우면서 다시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반대편 [[MBC GAME]]의 전신인 Gembc는 정식으로 KPGA투어를 런칭하여 정규 개인리그를 본격적으로 개최하였고, 이 KPGA투어는 곧 2003년 경에 [[MBC GAME 스타리그]]로 정식으로 개편되면서 [[양대 리그]] 체제의 토대가 마련된다. 또한 이 해에 [[게임TV]]의 전신인 GhemTV도 개국을 하게 되고 여기서도 [[GhemTV 스타리그]]를 개최하면서 다음 해 3회 대회까지 개최되지만 결국 [[온게임넷 스타리그]], [[MBC GAME 스타리그]]에 비해 롱런을 하지 못하고 2003년 경에 폐지되고 만다. IT계에서는 [[PC통신]]과 [[인터넷]]의 공존, 전환기로 여겨진다. 2002년 9월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했으며 2000년 기준으로 떨어지고 있던 PC통신의 영향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그러나 PC통신이 아예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넷츠고]]나 [[나우누리]] 정치게시판 등이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 다음 해인 2003년 [[하이텔]]이 기존의 VT 기반 PC통신 서비스와 단절된 완전한 인터넷 커뮤니티로의 전환을 발표하였고,[* 하이텔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2004년 [[한미르]]와 함께 합병되어 포털사이트 [[파란]]이 런칭되었다.] 이에 따라 [[천리안]]과 [[나우누리]]도 인터넷 커뮤니티로 전환했으며 [[넷츠고]] 역시 [[라이코스 코리아]]와 합병해 사라지면서 PC통신은 몰락을 맞게 되었다. 2004년 천리안이, 2007년 2월에는 하이텔이 PC통신 서비스를 완전 종료하였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나우누리마저 2013년 1월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철도계에서는 서울지하철공사의 초저항 전동차가 완전히 퇴역한 해이다. 이 해의 고등학교 신입생부터[* 일반적으로 1986년 3월 1일 ~ 1987년 2월 28일생.]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과정이 적용되었으며 이 해의 중학교 신입생[* 1989년 3월 1일 ~ 1990년 2월 28일생.]부터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 확대되고 제7차 교육과정이 2학년[* 1988년 3월 1일 ~ 1989년 2월 28일생.]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초등학교 제7차 교육과정이 5~6학년으로 확대되었다.[* 6학년인 1990년 3월 1일 ~ 1991년 2월 28일생이 제7차 교육과정 첫 혜택을 받게 되었다.] [[아폴로눈병]]이 초등학생ㆍ중학생ㆍ고등학생들 사이에 대유행한 해이기도 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02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었으며,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2002년 [[올해의 한자]]는 '帰 (돌아갈 귀)'였다. 국제연합에서는 이 해를 '세계 생태관광의 해'와 '세계 산의 해',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했다. 마지막으로 5월 공휴일이 없었던 해이다. [[어린이날]](5월 5일)과 [[부처님오신날]](5월 19일)이 모두 일요일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4월 5일 [[식목일]] 이후 6월 6일 [[현충일]]까지 휴일이 없었다. 여러 빅이벤트와 2000년대 초반의 문화 때문인지 [[응답하라 시리즈]]의 차기 작품에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해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