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3-F (문단 편집) == 쿠데타의 배경 ==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장악해 [[프랑코 정권|스페인을 철권통치하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975년]] 11월에 사망하고 스페인의 권력은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넘어가 [[1931년]]에 폐지되었던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잘 알고 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지 않고 프랑코 시대의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실제로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키면서도 정작 정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으며 이에 후안 카를로스가 정치에 대해서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프랑코는 '''"[[민주주의|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사실 프랑코도 자신의 후계자를 뽑아 두었던 상황이긴 했으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후계자로 삼았던 당사자]]가 반정부 세력에게 피살당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게 된 측면도 있었다.] 프랑코 정권 말기에 수상을 맡았던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Carlos Arias Navarro)가 [[1976년]] 7월에 [[후안 카를로스 1세|국왕]]의 압력으로 퇴진하면서 스페인의 민주화는 가속화되었다. 후임 수상에 임명된 [[아돌포 수아레스]]는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박차를 가해 [[1977년]] 4월에는 그동안 불법이었던 [[스페인 사회노동당]]과 [[스페인 공산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했다. 이 결과 [[스페인 내전]] 이후 [[소련]]에 오랫동안 망명[* [[스페인]], [[포르투갈]], [[중남미]] 국가의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 등 [[공산권]]에 망명하는 일이 잦았다.]해 있던 라 파시오나리아[* La pacionaria. '열정의 꽃'이란 뜻이다.]로 유명한 전 공산당수 돌로레스 이바루리 등의 구 공화국의 유력인사들이 귀환하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열린 총선에서는 수아레스 수상이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의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민주주의로의 급속한 이행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를 '''스페인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런 수아레스 수상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민주화 개혁에 프랑코 총통의 추종자들을 주축으로 한 육군 내의 [[우파]] 성향 장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게다가 [[공산당]]의 합법화나 [[ETA(바스크)|ETA]]의 [[테러]], 20%가 넘는 실업률 등으로 우파 사이에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독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77년 11월 군부 내 우파의 대표적 인사인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Jaime Milans del Bosch) 육군 중장과 피타 데 바이가 해군 제독이 하티바에서 회동을 가지고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한 뒤 국왕을 앞세운 소위 구국내각을 구성해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수립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978년]] 11월에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 헌병 중령과 사엔스 데 이네스트리자스 헌병 중위가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인 '갈락시아 작전(Operación Galaxia)'을 추진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테헤로 중령은 반란모의 혐의로 '''징역 11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갈락시아 작전의 불발 후 군부 내 우파 세력의 쿠데타 모의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국내에서는 군부의 쿠데타 소문이 끊이지 않아 불안감이 고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