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8운동 (문단 편집) === 프랑스에 미친 영향 === 이 혁명으로 결과적으로 [[샤를 드골]] 정권이 붕괴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68년 의회를 해산하고 6월에 실시된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성 세대들의 불안감으로 보수파가 압승하였지만 이후에 샤를 드골이 자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국민투표를 시행해먹었다가 투표에서 패배해 물러난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이것을 괜한 짓 해서 물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단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안건의 국민투표에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켜 정국을 돌파하는 수법 자체가 드골이 임기 내내 자주 써먹은 것이었고, 이 때문에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이라거나 [[신대통령제]] 정권이라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받아 왔던 것.[* 간단히 말해 정상적으로 의회나 지자체를 설득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정책이나 안건을 받아들이게 하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책이나 안건을 시행할지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제안을 하고 국민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선언해 투표 결과와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킨 것이다. 이 경우 일단 드골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구국영웅|전쟁 영웅]] 이미지를 가진 인기 많은 대통령이었기에 해당 정책이나 안건 자체에는 썩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골이 하자는 거니까 찬성을 찍겠다'거나 더 심한 경우 '썩 마음에 드는 주장은 아니지만 이런 걸로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거나 물러나게 할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이 찬성을 찍는다' 는 형태로 자신이 주장한 안건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단 국민투표를 거친 만큼 외형상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개인의 인기와 영향력을 통해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무력화시키고 제한된 수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탄입과 감시가 아닌 포퓰리즘에 기반한 독재라고 비판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1969년 프랑스 국민투표|69년 4월의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 당시 드골은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 확인에 정말 목마른 상황이었다.[*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68년 5월 위기의 수습을 전면에 나서 지휘하면서 드골의 입지가 약화되었던 측면도 있었다. 드골은 1968년 7월 퐁피두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리스 쿠브 드뮈르빌]]을 임명하였다.] 68년 6월 총선에서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압승을 거두며 일단 급한 상황은 수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68년 5월 위기(68운동) 당시 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격화된 대중운동으로 인하여 정부가 일부 주요 지방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시위대가 핵무기 지령실이 있는 대통령궁을 점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진지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드골이 서독에 주둔한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가 만약의 경우에도 자신의 명령에 따를지 확인하기 위해 국가적 비상사태의 와중에도 서독에 방문해야 할 정도였다.] 상황은 드골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드골로서는 위기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 자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여 영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드골의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것은 이전까지 드골이 국민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의 재확인 수단으로 애용해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68년 총선에서 지나치게 급진과격화되는 대중운동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드골파에게 표가 쏠린 것과는 별개로 프랑스의 지도자로써 드골을 더이상 신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이었던 것. 그리고 드골 역시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무리하게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은퇴를 결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68운동 이후에도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51.7%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정권 교체를 이룰 때까지 향후 10년 넘게 보수 정당이 계속 집권했고, 심지어 [[오일 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조차도 좌파 정당은 동거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다만 지방 의회와 기초단체장은 좌파가 장악하긴 했다.[* 사실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1차 선거에서 43.3%의 득표율로 여러모로 조건이 불리했음에도(퐁피두 대통령이 급사하여 선거가 갑작스레 치러졌다.) 보수 후보를 압도했지만 토론회에서 밀리고 보수층이 대거 결집하는 바람에 2차 선거에서 1.6%차로 석패했다. 1978년 총선에서도 2차 선거에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우파가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도[* 다만 독일에선 기민련/기사련-사민당 대연정 체제에서 사민당-자민당의 연립 정권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었긴 했다.] [[그랑제꼴]]을 제외한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등 광범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방송 등 미디어 업계도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공영방송]]이던 ORTF는 친정부 편향적인 보도로 비판을 받았고 사내에서도 파업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에 사측에서는 동년 10월에 [[블록광고|상업광고]]를 개시하고 보도 부문의 편향성을 완화시키는 등 유화책을 동원했지만 잡음은 계속되었고, 결국 1975년 ORTF는 공중분해되는 결말을 맞았다.[* 그 결과 [[TF1]]과 antenne2(현 France 2) 등으로 분리.] 반대로 현재 프랑스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리베라시옹'[* 그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가 주필을 맡았다.]이 창간되고 [[샤를리 엡도]]의 전신인 '[[하라키리|아라키리]]'(Hara-Kiri)가 만들어지는 데도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유럽과 미국에 알려졌지만 [[마오쩌둥|마오]]의 쩔어주는 능력으로 비참한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로 홍보되어[* 홍위병의 [[반달리즘|문화재 파괴행위]]나 소위 반동분자에 대한 사적재제는 감춰지고, 단순히 구습을 타파하는 문화 운동으로 홍보되었다.] 마오는 훌륭한 사상가이자 운동가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 1968년 5월 혁명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교]]/[[파리 대학교]]에는 [[체 게바라]]와 [[마오]]의 사진이 동시에 걸렸다.] [[마오주의|마오파]] 학생단체가 마이너 중에서는 메이저로 상당히 활동하였던 것은 [[흑역사]]일지도. 베트남 전쟁 규탄을 위해 각국의 학생 지도자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토론회가 끝나고 열린 평화가두시위에서 학생들은 [[호치민|"호! 호! 호치민!!"]]을 외쳤다. 프랑스에서는 68운동에 대해 무조건적인 기성 세대 부정과 지독할 정도의 혼란만 존재했다는 의견과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혁명이었다는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