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ABBA (문단 편집) === 음악 스타일 === >ABBA의 팝은 대다수의 현대 히트곡과는 달리 [[R&B]], [[힙합 음악|힙합]], [[소울 음악]], [[펑크(음악)|펑크]], 라틴음악의 영향, 즉 백인이 아닌 음악적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울바에우스는 1981년 인터뷰에서 "우리의 음악적 뿌리는 유럽인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래를 좋아합니다."라고 그들의 접근 방식을 다소 깔끔하게 요약했다. "이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에서는 아마도 우리의 노래가 잘 통할 겁니다. 미국에서는 팝 음악이 [[블루스]], [[소울 음악]], [[가스펠]]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는 ABBA의 유산에는 없는 것일 겁니다." >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스웨덴 전통 민속음악과 슐라거 음악에서 자랐다. 이 음악은 독특하게 대륙적인 유럽풍의 팝 음악으로 엉성하고 단순한 음악이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이 10대로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아 있는 영향의 네트워크를 개발했다: [[비치 보이스]]의 황금 십대 찬송가,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 [[레논-매카트니]]의 [[Rubber Soul]], 클래식 음악, 그리고 뮤지컬 극장. 성숙한 작곡가와 작사가로서 결정적인 멜로디, 아찔한 편곡과 대위, 그리고 지나치게 과장된 감정적 제스처를 선호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은 이 밴드가 정제되지 않은 감상주의 공급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 >― [[피치포크]][[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abba-gold-greatest-hits/|#]] ---- >ABBA는 지적이고 음악적인 단순함을 가장한 팝의 극대주의를 대표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보다 문화적으로 더 멀리 떨어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연구하고 학구적인 수의 정확성으로 재구성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슈퍼그룹으로 이해한 것을 하나로 모으기 전에 각 멤버들은 상당한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키보드 연주자 안데르손은 ABBA를 "스웨디쉬 비틀즈"로 만들며 히트곡을 썼다. 기타리스트 울바에우스의 후테난니 싱어즈도 스웨덴어로 된 커버와 미래의 스타가 되어 작사를 썼고, 결국 이 둘은 서로의 밴드에 기여했다. 울바에우스의 미래의 아내인 펠트스코그는 스스로 쓴 schmaltz로 10대 소녀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두 사람은 70년대 초반 그녀의 솔로 프로듀싱에 함께 일했고, 안데르손은 비슷한 펜으로 그의 파트너인 륑스타를 위해 홈통 히트곡을 제작했다. 네 사람 모두가 재능과 경험을 모아보니 결과는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 >동시대인들은 처음에는 외부 프로듀서/송라이터에 의존했지만, ABBA는 대체로 자급자족적이었다. 매니저 스티그 앤더슨의 약간의 영어를 보조해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만의 가사를 썼다. 그들은 [[스틸리 댄]]과 함께 연주했던 것과 같은 숙련된 세션 음악가들과 함께 그들을 편곡하고, 제작하고, 노래하고, 공연했다. ABBA는 대부분의 [[MTV]] 이전 공연자들보다 더 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투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음실은 그들의 집이었고, 그들은 스톡홀름의 폴라 스튜디오를 지은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퀸(밴드)|퀸]]과 10cc처럼 ABBA는 새롭게 확장된 멀티 트랙 레코딩의 교향곡과 합창의 가능성을 악용한 배열을 빠르게 구축했다. 직설적으로 보이는 고리의 풍부한 질감 렌더링은 "이렇게 싸게 보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돌리 파튼]]의 공리와 맞먹는 것이었다. > >자꾸 귓전에 맴도는 곡조에 대가인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상당한 조화 복잡성을 자랑했다. [[모타운]]의 클래식 작사가들처럼 아픈 가사("S.O.S," "Money, Money, Money")로 날카로운 멜로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뛰어났고, 때로는 정반대의 조합("I Have a Dream," "Chiquititita")으로 슬픈행복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행복한 히트곡들에도 몇 가지 이상의 [[블루 노트]]가 포함되어 있다. "댄싱 퀸"의 희열적인 현악과 리듬을 벗겨내고 그들의 유일한 미국 차트 토퍼는 훨씬 슬픈 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황홀함을 느끼도록 배열되어 있다. 하모니가 'Feel the beat from the tambourine, oh yeah' 후렴구절에 맞춰 최고조에 달할 때, 음 사이의 프리송은 가사에 불균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삶은 그들의 상황보다 훨씬 더 큰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 >노래방에서 그것들을 시도했던 여러분 중 누구나 이미 알고 있듯이, ABBA의 클래식들은 도전적일 수 있다. 이것은 메릴 스트립이 아닌 ABBA의 주크박스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 버전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펑크와 힙합은 많은 현대 팝의 멜로디적 복잡성을 거의 감소시켰는데, 특히 이 시구들에서는 곡이 현재 한계 간격 내에 있는 소수의 음표들 사이에서 잘 조율되는 경향이 있다. ABBA의 구절은 오늘날의 전형적인 후렴구보다 상당히 멜로디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들은 소프라노 펠트스코그와 메조소프라노 륑스타가 각각 일반 록커들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 종종 온전한 합창단으로 개조된 그들의 목소리는 프레디 머큐리가 퀸의 가성소리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초인적인 조화를 이루었을 때와 같이 그들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정렬되었다. >---- >― [[PBS]][[https://www.npr.org/sections/therecord/2015/05/23/408844375/abbas-essential-influential-melancholy|#]] ---- >ABBA의 음악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행복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북유럽]]의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꽤 슬펐을 때도, 우리는 항상 기쁨에 넘친 것처럼 들렸다. >---- >― 비에른 울바에우스[[https://www.brainyquote.com/topics/abba-quotes|#]] ---- [[https://pitchfork.com/thepitch/the-reconsideration-of-abba-a-band-beyond-taste/|취향을 초월한 밴드 ABBA의 재평가(피치포크)]] 그야말로 팝 음악의 마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체 스타일의 팝 음악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ABBA의 멤버들은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과 함께한 ABBA 그룹 활동 전에도 이미 자신들만의 음악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음악의 다양한 스타일들을 디자인하고 작곡하는 것에 대해서 수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광범위한 음악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ABBA의 멤버들은 모두 곡을 쓸 수 있었지만, ABBA에서는 오직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올바에우스만이 송라이팅 팀을 구성했는데, 특히 벤뉘 안데르손은 작곡을 하고 비에른 올바에우스는 가사를 썼다. ABBA의 음악적 롤 모델은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치 보이스]]였다. 또한 옛 스웨덴 전통 민요들[[https://nypost.com/2009/09/23/benny-and-bjorn-talk-influences/|#]], 고전 작곡가 [[모차르트]], [[주세페 베르디|베르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도 그들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ABBA는 더 풍부하고 깊은 멜로디를 만들어내기 위해 보컬과 인스트루먼트를 층층이 쌓아 올린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ABBA의 독특한 사운드는 당대 최고의 팝 사운드로 여겨졌으며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에도 ABBA의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으로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모국인 스웨덴의 경우에 더 그랬다. 음악학자인 Per F. Broman은 "ABBA의 문제는 실력이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업적이라는 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업성이 강한 [[이지 리스닝]] 음악이 ABBA가 추구했던 장르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70년대 전성기 당시 ABBA를 무시하기도 했다.[* 동시기에 활동했던 밴드 [[퀸(밴드)|퀸]]도 비평가들의 평이 박했다. ABBA와 퀸은 세대를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앨범보다는 싱글 위주로 좋은 평을 받는다. 이 때문에 두 그룹의 최고 판매 앨범은 베스트 앨범이다.] 그러나 해체된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ABBA의 생명력이 꺼지지 않자 ABBA를 긍정하는 평론가들도 많이 생겼으며, 2010년에는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팝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ABBA는 이지 리스닝 계열 팝 밴드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밴드다. ABBA는 그룹 경력 이전에 다양하게 활동했던 음악적 배경 때문에, 초기 몇 년 동안 다양한 음악 장르들을 꾸준히 실험했다. 대표적으로 'People Need Love'나 'He Is Your Brother'와 같은 초기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의 'Flower-Power- 시대'의 영향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ABBA는 'Hasta Mañana' 같은 슈팅 발라드에서부터 'Honey, Honey', 'I Do, I Do, I Do, I Do, I Do'와 같은 레게 팝과 트로피컬 러블랜드 스타일의 팝 음악, 'Waterloo'나 'So Long' 같은 록 노래까지 다양한 팝 음악들을 만들었다. ABBA는 또한 'Watch Out', 'Sitting In The Palmtree', 'King Kong Song' 같은 뛰어난 곡들을 제작했으며, 또한 다소 실험적인 팝을 제작했다. 1975년 3월에 제작된 'S.O.S'와 'Mamma Mia'부터 ABBA는 특유의 고유한 음악 스타일을 완성해냈고, 그 후 몇 년 동안 꾸준히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 콤비의 콜라보레이션 과정은 종종 "영감적이고 극대주의적", "완전 [[완벽주의]]"로 묘사된다. 작곡을 위해, 두 음악가들은 주로 [[스톡홀름]]의 작은 샤이어 섬 비고스에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음악을 만들었다. 작곡의 기초 작업은 그들이 주로 다루는 악기(올바에우스는 [[기타]], 안데르손은 [[피아노]])로 몇 시간 동안 함께 연주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연주한 멜로디에 대한 흥미롭고 직관적인 접근 방법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 멜로디를 하나의 완전한 곡으로 완성시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은 가끔 간단한 영어 단어나 구절을 불렀지만, 그것은 보컬 멜로디를 구상하기 위해 임시로 하는 것이고 나중에 나온 노랫말과는 거의 맞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노래에는 스트록과 레프레인이 간단한 변화로 따르는 전형적인 기본 구조가 있지만, 이러한 구조를 완성한 노래 'Intermezzzo No.1'에서 그들의 작곡 능력을 들을 수 있다. 이후 'The Name of the Game'와 같은 노래들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들은 새로 쓴 곡이 전에 이미 녹음한 노래와 너무 비슷했을 때, 곡을 폐기하고 그 곡을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ABBA의 미공개 노래 리스트이다.[* ABBA는 미공개 음원을 한번도 공개한적이 없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올바에우스는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없었고, 자신들을 도와주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듀서들이 나중에 더 많은 것을 작업하게 하기 위해 프로듀서들에게 자신들이 작곡한 곡들을 귀로 듣고 외우게 하였다. 이 방법에 대해, 두 아티스트들은 나중에 "곡을 처음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머리에 각인되는 곡이어야 정말 잘 만든 곡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곡의 초안이 완성된 후 올바에우스는 주로 그 멜로디에 맞는 기본 텍스트를 썼다. 울바에우스는 각각의 단어와 가사를 멜로디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여 언어의 멜로디가 그 노래의 멜로디와 크게 일치하도록 하였다. [[스웨덴어]]가 모국어인 울바에우스는 매니저 스티그의 도움을 받아 영어 텍스트를 완성했다.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초기에는 ABBA 음악의 일부 관여했고 ABBA 곡들의 노래 가사를 썼다. 매니저 일 때문에 가사를 쓸 시간이 없을 때에는 올바에우스에게 일부 가사의 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스티그가 쓴 가사들은 단순하고 때로는 도전적이지 않은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Does Your Mother Know부터 올바에우스는 단독으로 작사를 도맡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도전적이고 때로는 심오한 내용을 썼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가사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노래를 종종 ABBA의 두 커플의 관계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삶과 유사함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올바에우스에 따르면, 그 노래는 그가 작사한 유일한 [[자서전]] 노래이며 부모의 관점에서 자신의 자녀들의 빠른 성장을 주제로 한 그의 딸 린다에게 바치는 감성적인 발라드라고 한다. 음악 제작 과정에서, ABBA는 그들의 곡과 사운드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안데르손과 울바에스는 전자 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드럼 등 당시의 대표적인 악기들 외에도 오케스트라와 당시 새롭게 등장한 신디사이저를 추가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의 음악적 동반자인 음향 엔지니어 마이클 B는 정교한 스튜디오 기술을 선보였다. 그는 미국 음악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에게 영감을 강하게 받았으며 여러 테이프에 음성과 악기를 녹음하여 일부 소리 요소를 느리게 하거나 시간을 약간 단축시키는 등 이들을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현대 스튜디오 기술을 통해 그들의 노래들은 독특하고 특이한 소리를 얻게 되었다. ABBA는 자신들의 음악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스튜디오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했고 곡을 녹음하는데에 항상 많은 돈을 투자했다. ABBA는 1977/1978년, 스톡홀름에 폴라 뮤직 스튜디오(Polar Music Studio)라는 자신들만의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었으며 미국 시장에서 더 성공하려는 욕심으로 초기 '80년대 팝'의 사운드를 완벽하게 선보이기 위해 그들은 [[마이애미]]에 있는 크리트리아 스튜디오에 가서 최고의 음악 프로듀서들과 협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ABBA는 당시 개발되어 있는 스튜디오 기술이 집약된 수준 높은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을 제작했다. 그들의 예술적 창조와 정교한 제작 방식으로 인해, '''ABBA는 오늘날 현대 대중 음악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