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OØWY (문단 편집) == 역사 == 1981년 보컬의 [[히무로 쿄스케]], 베이스의 마츠이 츠네마츠, 기타의 [[호테이 토모야스]]와 모로보시 아츠시(諸星アツシ), [[색소폰]]의 후카자와 카즈아키(深沢和明), 드럼의 키무라 마모루(木村マモル)[* 탈퇴 이후 'INSTANT LOVE'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와 함께 '폭위(暴威)'를 결성하여 데뷔했다. 첫 투어 이후 키무라가 탈퇴하고 타카하시 마코토가 가입하고, 1982년에 발음만 똑같은 BOØWY로 개명했다.[* 둘 다 ぼうい라고 발음한다.] 이렇게 해서 초창기 멤버는 총 6명이었는데, 1982년 모로보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우리가 아는 4인조 구성이 되었다. 메이저 데뷔하면 계약금으로 차와 여자친구에게 줄 반지를 사고, 해외여행 가보는 것과 하루 종일 술을 마셔보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소년들이었으나, 대도시 [[도쿄]]는 냉혹했다. 집에 전화도 없어서 급한 일이 생기면 [[목욕탕]]의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고, [[커튼]]도 [[냉장고]]도 없는 [[이케부쿠로]]의 [[하숙]]집, 굶기는 밥먹듯이…[* 호테이의 경우 술집에서 옆사람이 남긴 술안주를 몰래 집어먹고 그랬다고 한다.] 거기다 돈을 벌어오는 건 마츠이와 타카하시 둘뿐이라 돈에 쪼들리는 생활은 덤이었다.[* 히무로와 호테이는 그냥 [[니트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여러 에피소드[* 많이 알려진 일화로, 무명 시절 지방에 2~3만 명 정도 모인 무대가 있다는 말만 듣고 기껏 지방까지 갔더니, 정작 관객은 무대 근처의 2~30여 명이 전부였고, 개런티는 '''야채와 술'''로 받았는데, --이건 개런티라 하기도 뭐하다.-- 개런티를 받아 차비로 쓸 생각에 돈을 다 써버리고 온 BOØWY 멤버들은 당황했다고… 놀랍게도 [[https://youtu.be/GWP8D84GCRI|이]] [[https://youtu.be/UeHWcgvWSWM|라이브의]] [[https://youtu.be/HhlxxQR49V4|영상]]이 남아있다.]를 겪으며 꿈을 키워나갔던 BOØWY는 1982년 마침내 첫번째 앨범 MORAL을 들고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가는 데마다 가사 이미지가 더럽다면서 퇴짜.[* 그도 그럴 것이 [[타이틀곡]] MORAL의 가사 내용을 보면 '타인의 불행이 너무 좋아'라든가 '그 녀석이 자살했을 때 나는 웃어버렸어'라는 내용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저런 상황에서 긍정적인 가사가 나오면 정말 대단한 멘탈이다.~~ 참고로 MORAL의 '자살한 그 녀석'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야마다 카마치(山田かまち, 1960~1977)라는 히무로와 마츠이의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으로 셋이서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고. 실제로는 자살이 아니라 집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치다 감전사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발매는 했어도 음악 팬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1983년에 나온 두번째 음반 INSTANT LOVE는 소속사인 저팬 레코드가 도쿠마 저팬으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홍보는 커녕 포스터 한 장조차 안 만들어 줬다고 한다. 전국의 라이브 하우스를 돌면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스스로를 알려갔던 BOØWY. 뒤늦게 음악 관계자들에게 알려져 TOSHIBA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1985년 [[독일]](당시 [[서독]])에서 녹음한 3집 BOØWY가 대성공을 거둔다. 호테이는 그 해 [[페르난데스(버니)|페르난데스]]에서 자신의 [[Telecaster]]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a3/d1/6a/a3d16a204e19bd2bc9157fa818bd998d.jpg|모델]]이 제작되자[* 그의 텔레캐스터는 그의 당시 메인 기타였던 [[ESP(기타)|ESP]] [[http://isovicious.up.seesaa.net/image/hotei.jpg|네비게이터 텔레캐스터]]를 베이스로 제작되었다.] 감격의 눈물을 닭똥처럼 떨어뜨렸다고 한다. 같은 해, 스튜디오 [[세션]]을 해주러 다니다 만난 [[야마시타 쿠미코]]와 결혼을 발표한다. 1986년 'JUST A HERO' 앨범[* 오리콘 5위]과 'BEAT EMOTION' 앨범[* 타이틀 곡은 B·BLUE. 오리콘 1위], 그리고 1987년 PSYCHOPATH[* 타이틀 곡은 Marionette. 오리콘 1위. 여담으로 Marionette의 [[https://www.youtube.com/watch?v=UQ5BLs-2C5A&list=RDEMVSlHXjRpW6q9ei5yiNGuDw|뮤직비디오]]는 [[가이낙스]]에서 제작했다. [[키타쿠보 히로유키]]와 [[마에다 마히로]]가 제작에 참여했다. 히무로를 모델로 한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하며 당시 절정이었던 인기덕에 직원 모두가 참여하려고 안달이 났었다고. ] 앨범으로 정점을 찍으며 쾌진격을 거듭하던 BOØWY는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에서 해산을 선언하였고[* 해산선언 당시의 영상 [[https://youtu.be/yEnW2b_2z40|해당 영상]]], 1988년 4월 4일, 5일 이틀 간의 [[도쿄돔]]에서의 라이브로 BOØWY로서의 활동을 끝냈다. 해산을 결정한 밤, 호텔에서 아침까지 울었다던 호테이. 팬에게의 최후의 인사로서 발표한 2일간의 라스트 도쿄돔 기그는 10분만에 95,000장 전 티켓이 매진 되었다. 심지어는 예약 개시일 일부 지역의 전화 회선이 고장나기도. 이 때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인 'LAST GIGS'는 라이브 앨범으로서 이례적인 150만장을 팔아치우며 신기록을 갱신했다. BOØWY가 일본 록계에 있어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으로 특유의 세련된 음악성과 미디어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 강인하고 반항적인 자세, 참신한 비주얼과 스타일, [[박수칠 때 떠나라|절정기에서 해체를 맞이한 행적]] 등이 주로 높이 평가된다. 그동안 매니아층에게만 호응을 얻었던 '[[록 음악]]'이란 장르가, BOØWY로 인해 대중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종종 "BOØWY 이전" "BOØWY 이후"라고 표기되고, 현재도 BOØWY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들이나 카피 밴드가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일본 록]]의 꺾고 떠는 뽕삘 나는 창법은 히무로 쿄스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일설도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밴드였다. BOØWY 해산 이후, 히무로는 일본의 거물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로서 지금도 투어를 개최하면 관객석이 만석을 채우는 등의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았으며 호테이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베이시스트]] 마츠이나 [[드러머]] 타카하시도 히무로나 호테이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대로의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테이가 처음에 히무로의 밴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가 '주먹이 무서워서'였다는 말이 있다. 호테이가 외모나 키, [[Yoshiki]]와의 일화 때문에 한 주먹을 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호테이는 ~~지금의 인상 드러운 아저씨 모습과는 다르게~~ 순둥이에 가까웠고,[* 원 작성자의 정보력 부족 혹은 개인적 의견으로 판단된다. 호테이는 데뷔 후 몇 번이나 상해 사건을 일으켰으며, 첫 부인이었던 가수 [[야마시타 쿠미코]]에게 가정폭력을 휘둘러 여러번 심각한 부상을 입힌 전적이 있다. 이후로도 많은 뮤지션들과의 알력으로 절교나 단교 케이스가 이어졌다.] 히무로 쿄스케가 고교 시절 [[군마현]] 일대를 주먹으로 평정한 소문난 [[싸움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 락계 선배인 [[LOUDNESS]]의 소문난 불같은 싸움꾼 [[타카사키 아키라]]도 인정했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로 인해 호테이가 히무로를 싫어해 보위가 해체되었다, 히무로가 호테이의 여자친구를 빼앗았다, 호테이가 히무로의 아이돌적 인기를 질투했다는 등의 이야기[* 보위의 해산 원인에 대해서는 워낙 다양한 사실 무근의 루머들이 난무하고 있어,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이 낫다.]도 돌았는데, 비록 보위의 대성공에는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던 호테이의 공이 크지만 그런 그에게 먼저 밴드를 만들자며 제안했던 것은 히무로이며 히무로 또한 카리스마있는 퍼포먼스와 가창력으로 [[보위]]의 인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사실상 히무로와 호테이가 밴드의 상징적 존재이자 투탑이었다.] 또한 인기를 얻기 전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동고동락해 온 만큼 그 둘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악화가 해산에 영향을 주었냐는 질문에 히무로와 호테이 둘 다 부정한 적이 있으며, 여전히 서로를 높이 사며 마츠이와 타카하시 또한 동등한 밴드의 일원이라 언급하는 등 밴드의 해체에는 영향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훗날 타카하시의 자서전을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첫번째 아내였던 가수 야마시타 쿠미코의 세션 활동을 병행하던 호테이가 마츠이에 이어 타카하시까지 그녀의 라이브 공연에 백 밴드로 서줄 것을 권유하면서 멤버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평론가 요시다 고우의 라디오 방송에서의 증언을 통해 사실임이 밝혀졌다.] 타카하시는 이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도 그럴 것이 밴드 멤버의 4분의 3이 다른 가수의 백밴드로 서게 되는 셈이다.] 리더이자 보컬인 히무로에게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고. 한편 호테이의 자서전에서 직접 구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확실히, 해산을 먼저 입에 올린 것은 나였다. (중략) 하지만, 결성 이래 계속 흔들렸던 밴드가 붕괴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도 나였다. (중략) 마지막의 마지막에 내가 악역을 자청했을 뿐이다. 내게는 '해산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덤까지 가져갈 예정이다.' [* 確かに、解散を最初に言い出したのは俺だった。(中略)しかし、結成以来、揺れに揺れ続けてきたバンドを崩壊に至らないよう手を尽くしてきたのも俺である。(中略)最後の最後で、俺がワルの役を買って出ただけの話だ。俺には俺の、”絶対解散せねばならない理由”があった。しかし、その理由は墓まで持っていくつもりだ。][* 이 자서전에 대해서는 현지의 보위 팬들 사이에서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너무 본인 위주의 서술에 치우쳐 자기미화가 심하다는 비판이 꽤 많다. 또한 무덤까지 가져갈거면 (히무로처럼)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아야 맞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들이 해체한 해에 태어난 야구선수 [[호소야 케이]]가 이들의 광팬이라고 한다. 등장곡과 응원가 모두 이들의 노래로 해 놨을 정도다. 또 [[모닝구무스메]] OG [[아베 나츠미]]도 보위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닝구무스메로 데뷔하게 된 계기인 오디션 프로그램 '[[ASAYAN]]'에 참여한 것도, 원래는 프로그램 우승시 록 밴드의 보컬로 데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