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CERN (문단 편집) == 역사 ==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원자 내부 쯤으로 가면 상대론적 효과가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입자물리부터는 아예 상대론적 양자역학으로만 거의 기술되니,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 맞다. 멀리 안 가더라도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중요한 에너지원 중 하나인 원자력이 다름 아닌 핵물리에서 나타나는 [[질량-에너지 동등성|상대론적 효과]]에 많이 의존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이 대두된 이후 원자 내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때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한 국제 단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서한은 물론 당시 발달하기 시작한 교통망을 통해 직접 움직이는 것까지 동원하여 유럽 단위로 교류하였다. 그 유명한 [[솔베이 회의]]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세계 대전이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물리학자들이 가진 국제적 단위의 협력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특히 미국에서 유례 없는 대규모로 벌어진 초대형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맨허튼 프로젝트]]와 그 결과물인 [[원자폭탄]],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두 차례의 격발]]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을 가져다 주었으며 원자 내부에 대한 지식을 평화로운 목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원자 내부 물리학에 대한 국제적인 공조가 더욱 절실해진 상황이 되었다. 이미 심각해질 정도로 이루어진 미국으로의 두뇌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 건 물론이다. 이에 공감대를 느낀 건 여러 유럽 국가들의 지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루이 드 브로이|드 브로이]]의 공이 컸는데, 무려 [[공작(작위)|공작]] 작위를 가진 귀족인만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드 브로이가 1949년에 이에 대한 건의를 내는 것으로[* [[https://www.nndb.com/people/313/000072097/|출처]]] 그 화두가 던져졌다. 마침내 1951년 유럽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국제 회의에서 유럽 핵물리 연구위원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의 창설이 건의되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원어명은 프랑스어이며 상술했듯이 이 명칭의 두문자가 바로 '''CERN'''이다. 이때에는 아직 핵물리와 입자물리가 분화되지 않아서 연구소 명칭에 핵물리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년에 12개 국가의 참여를 포함한 최종적인 형태가 정해지게 되었으며, 1954년에 공식적으로 창설되기에 이른다. 그 해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스위스가 중립국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갈등에 휘말릴 염려가 적다고 예상되어서 부지로 선정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5년, 펠릭스 블로흐가 첫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https://home.cern/about/who-we-are/our-history|출처]]] CERN의 장대한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얼마 후인 1957년, CERN의 첫 가속기인 싱크로사이클로트론(Synchrocyclotron; SC)이 완공되었고 가동을 시작하였다. 이 가속기는 양성자를 600 MeV까지 가속시킬 수 있었으며 당시 발견된 다양한 소립자들의 성질들을 규명하는 임무를 맡았다.[* [[입자물리학/역사]] 문서를 보면 이 당시의 혼란 상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파이온과 뮤온의 성질을 관찰하는 것에 주요 임무들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의 임무 중 입자물리 파트는 얼마 안 있어 죄다 빠지게 되는데, 바로 양성자 싱크로트론(Proton Synchrotron; PS)이 바로 얼마 후인 1959년에 가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PS는 SC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에너지인 28 GeV까지 양성자를 가속시킨다.[* 이때 재밌는 일화가 있다. 사실 당시 소련은 듀브나에 건설된 Synchrophasotron을 운영 중이었고 이 가속기는 이미 10 GeV까지의 가속을 해낼 수 있었다. 하루는 당시 CERN 소장인 존 아담스(John Adams)가 듀브나로부터 온 보드카 한 병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인 10 GeV 가속을 넘겨야 이 병을 비울 수 있다는 주문이 담겨 있었다. --일종의 도발-- 이 에피소드의 출처이기도 한 이 [[https://timeline.web.cern.ch/proton-synchrotron-starts|페이지]]를 보면 존 아담스가 그 병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PS가 완공되고 일단 24 GeV까지 가속시키는 데에 성공하자, CERN은 그 보드카를 비워 버리고 증거 사진을 병 속에다 넣은 다음, 듀브나로 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더 무거운 중입자(baryon)들의 성질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가속기만 발전한 것은 아니다. 가속을 시켜 잘 충돌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충돌 결과도 잘 관찰해야 한다. PS까지만 해도 거품 상자를 이용하여 이를 수행하였는데, 준비 과정이며 자료 수집이며 많은 것에 손이 많이 갔다. 그 당시에는 거품 상자 안에서 나타난 궤적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그 궤적을 '''손으로 잘 이어, 즉 수작업으로 그려''' 충돌 결과를 관찰해야 했다.[* 그러한 수작업은 의외로 여성 직원들이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 CERN 과학자들은 이 여성 연구원들과 많이들 결혼했다고 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로, 거품 상자로는 고속의 반응을 잡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의 검출기가 필요했는데, 조지 차르팍(Georges Charpak)이 1968년에 개발한 와이어 검출기(wire detector)가 바로 그것이었다. 수많은 전선들이 평행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양 끝을 가로지르는 검출기 내부에 고압의 가스를 채워 넣고 고전압을 걸어준 다음 그 안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면 생성된 입자들이 궤적을 따라 가스를 건드려 스파크를 만들고, 이때 생긴 스파크가 전선을 건드려 전기 신호를 만들 것이다.[* 쉽게 생각해, [[가이거 계수기]]와 원리는 똑같은데, 좀 더 커지고 그게 수백 배의 입력 채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얻어진 3D 신호들을 분석하면 입자들의 궤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품 상자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입자들을 검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검출기들이 개발되었지만 그 어떤 것이든, 심지어 지금 [[LHC]]에 포함된 검출기들 역시 이 와이어 상자 검출기를 효시로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칼로리미터(calorimeter)는 신호를 생성하는 원리가 제법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와이어 상자의 자손으로 어찌저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획기적인 전환에 대한 공로로 차르팍은 노벨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71년, CERN은 PS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SPS(Super Proton Synchrotron) 건설을 승인하였고, 1976년에 완공되었다. SPS는 둘레 7 km에 달하는 당시 최대 사이즈의 가속기었으며 6.3 km인 페르미랩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조금 더 컸다.[* 참고로 SPS의 [[크고 아름다운]] 규모는 조금 더 다른 차원의 제어 시스템을 요구했는데, 이에 Frank Beck와 Bent Stumpe가 '''세계 최초의 터치스크린'''을 개발하여 SPS의 제어 시스템에 탑재시켰다. 다만 당시에는 그 외에 다른 용도로 써먹을 생각을 못해서 --즉 이게 돈이 될 거라는 생각까진 못해서-- SPS에 쓰는 것까지만 하고 말았다.(...)] 하지만 가속기의 한계로 페르미랩이 이미 1970년대에 도달한 500 GeV 양성자 가속(즉, 충돌 시 에너지 1 TeV)에는 다소 못 미치는 400 GeV 가속이 한계였다.[* 현재에는 450 GeV까지 가속하여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입자물리 실험에 큰 족적을 남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에너지로[* 거기다 1981년에 이루어진 양성자-반양성자 충돌기로의 전환도 한몫했다.], 아래에 설명되었듯이 W 보존과 Z 보존이 1983년 바로 이 가속기로부터 얻어진 충돌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CERN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거대한 프로젝트인 LEP(Large Electron-Positron collider)를 수행하였다. W 보존과 Z 보존의 발견은 [[표준모형]]이 맞다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졌고, 이제 이 표준모형이 가진 여러 면들, 특히 표준모형의 수많은 파라미터들, 그 중에서도 W, Z 보존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를 위해 양성자-(반)양성자 충돌 대신 전자-양전자 충돌을 일으키는 가속기를 개발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바로 LEP이다. 이전의 가속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둘레 27 km 짜리 거대한 가속기가 지어졌다. 이 사이즈로부터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LEP가 쓰던 터널을 그대로 쓴 게 바로 [[LHC]]이다. 즉, LEP는 LHC의 전신인 것이다. 다만 질량이 8~90 GeV에 달하는 W, Z 보존을 생성하기 위한 에너지를 전자-양전자 충돌로 얻기 위해서는 SPS보다 훨씬 더 큰 가속기가 필요했다. 입자의 질량이 가벼울수록 제동복사로 인하여 잃는 에너지가 더 크다. 사실 SPS의 400 GeV까지 가속시킬 필요는 없더라도 W, Z 보존을 전자-양전자 충돌로부터 다량으로 얻기 위한 에너지는 상당히 컸으며, 실제 LEP의 충돌 시 에너지는 209 GeV에 달하였다. 같은 사이즈인 LHC의 충돌 시 최대 에너지인 14 TeV에 비하면 상당히 작긴 하다. 하지만 양성자의 그 복잡한 (그리고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내부구조로 인해 너무 많은 불확정성을 가진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에 비하여[* 딸랑 쿼크 세 개만 있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양성자 내부를 지배하는 강한 상호작용은 현 인류의 지식으로 아직 다루기가 너무 힘든 존재이다. [[양성자]] 문서를 보면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완전히 단순하지 않은 내부 구조는 기본적으로 충돌 결과물의 총 운동량 중 빔 방향의 운동량 성분을 알 수 없도록 만든다.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이 일어나면 이들 두 입자 전부가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일부만 반응에 참여하는데, 문제는 이때 양성자의 에너지 중 얼마만큼이 쓰이는지 전혀 알 수 없거니와 매 충돌마다 다르며, 심지어 두 양성자가 내놓는 지분이 같을 이유도 없고 실제로 같지도 않다는 것에 있다. 그래도 빔 방향에 수직한 성분만으로라도 어떻게 잘 측정할 수 있긴 하지만, 포기하는 게 꽤 많긴 하다.] 그런 거 없는 전자-양전자 충돌은 물리적으로 엄청나게 깔끔한 결과를 내놓기 때문에 이를 통한 정밀 실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현재 논의되는 차세대 대형 가속기들 역시 LEP와 LHC처럼 먼저 전자-양전자 충돌 실험부터 한 다음, 이를 양성자-(반)양성자 충돌 실험으로 전환하여 운용한다는 것을 기본 계획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LEP처럼 전자-양전자 충돌 실험은 현재 알려진 입자물리의 성질들을 정밀측정하는 것에 주 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아직까지 직접적인 측정이 되지 않은 힉스 입자의 주요 파라미터들을 직접,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목표이다.] SPS와 후신인 LHC가 이루어낸 거창한 발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표준모형을 정밀하게 더 잘 이해하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다. 주변 역의 기차표까지 동원해 가며 실험을 했다는 게 바로 이 LEP 이야기이다. 그렇게까지 하여 LEP는 1989년에 가동을 시작한 후 W와 Z 보존의 질량을 포함한 다양한 물리량들을 엄청난 정밀도로 측정하였다. 잠시 막간으로 이야기할 만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월드 와이드 웹]]의 탄생이다. 1990년에 [[팀 버너스리]]가 처음 발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저 두 문서들을 참고하자. LEP가 어느 정도 운영을 한 후, 당초 계획대로 [[LHC]] 건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000년에 LEP는 완전히 운영을 중지하였고 바로 분해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분해되고 남은 자리에 양성자-양성자 충돌기인 LHC가 설치되었다. LHC에 대한 설명 역시 해당 문서를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2012년, LHC의 두 범용 검출기인 ATLAS와 CMS의 연구진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두 검출기로부터 표준모형의 마지막 남은 미발견 입자인 [[힉스 입자]]가 결국 발견되었다. 그 후로도 LHC는 계속 가동되었으며 지금은 업그레이드를 위하여 가동을 중지한 상태이다.[* 원래 2021년에 재가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계획이 미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