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35 (문단 편집) === JSF 사업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3px-X-35.jpg|width=100%]]|| || X-35 || 처음 개발의 시작은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 진행한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와 [[영국 해군]]의 아음속 기종인 [[AV-8]] 해리어를 대체하여 쓸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단거리 이륙/수직 착륙형 전투기사업인 CALF(Common Affordable Lightweight Fighter;공통 염가 경량전투기)이었다. 이 개발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 공군은 MRF(Multi-Role Fighter; 다목적 전투기 획득사업)으로, 미 해군은 A/F-X (차세대 미해군 공격기 획득사업)으로 각각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스텔스 경전투기 사업을 진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예산 문제 때문에 이 사업들은 JAST(Joint Advanced Strike Technologies; 합동 차세대 타격기술) 사업으로 통합이 되었고 그후 미 하원은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CALF 사업을 JAST 사업에 합병시켜 최종적으로 JSF(Joint Strike Fighter; 3군 통합타격기) 사업이 시작하게 된다. 사업의 목적은 해군,공군,해병대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실용화된 전투기와 공격기[* 구체적인 퇴역 대상은 공군의 F-16 파이팅 팰컨과 A-10 선더볼트2, 해군의 F/A-18A~D 호넷, 해병대의 F/A-18 C/D 호넷, AV-8D 해리어 2 등이다.]들이 21세기에 들어서 퇴역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그 후속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사실 JSF 계획 전부터 미국의 각 군은 후속기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 동유럽에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고 1991년 12월 25일에 소련이 붕괴되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냉전이 종결됨에 따라 미국은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동시에 군대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이런 정치환경에서 각 군이 요구하는 새로운 전투기와 공격기를 개별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낭비라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각 군의 후속기 연구들을 하나로 모아 단 하나의 기종으로 통일하려고 했다. 덕분에 JSF계획의 기종선정사업에 뛰어든 록히드 마틴과 보잉은 무수히 날아드는 각 군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요구사항을 모두 충족시켜야 했다.[* 대신 그만큼 규모가 컸으므로 경쟁에서 승리할 시 얻는 이익도 막대했다.][* JSF 계획에서는 동일한 설계의 기본 프레임을 활용해서 각 군의 서로 다른 요구사항을 충족하도록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즉 각 군의 서로 다른 요구를 하나의 기본설계로 충족하고 동시에 운용과 유지에 드는비용도 대폭 절감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여러 형태의 작전반경에서 다양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무장능력이 뛰어나야 했으며, 소형 단발기로서 높은 스텔스 성능을 갖추어야만 했다.]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주로 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진입 속도가 낮은 것을 원했고 때문에 착함에 견딜 수 있는 강도, 되도록 커다란 전투행동반경을 요구해왔다. 해병대는 수직이착륙기인 AV-8B의 후속으로 배치할 생각이었기에 그와 동일한 능력을 요구했다. JSF는 고민 끝에 위의 해군과 해병대의 요구를 완전히 동일한 항공기로는 동시에 충족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 군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파생형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이런 이유로 F-35는 공군용인 A, 해병대용 B, 해군용 C로 나눠 생산한다.] 위와 같이 각 군의 요구조건이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에, 록히드 마틴과 보잉은 자신들이 그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기술이 있다는 것을 JSF 사업단에게 증명하기 위해 기술개념 실증기부터 만들어야 했다. 보통 Y로 시작하는 [[YF-23|다른 프로토타입]]과는 달리 [[X 실험기 시리즈|실험기에 쓰는 X 넘버링]]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에 중점을 두고 보수적으로 접근한 보잉은 [[X-32]]를 비교적 순조롭게 만들어 내놓았으나, 보다 고성능을 추구한 록히드 마틴 쪽은 숱한 난관을 뚫느라 일정이 계속 늘어졌다. 혹자는 '스텔스기도 만들 줄 알고, 초음속기도 만들 줄 알고, 수직이착륙기도 만들 줄 아는데 그 셋을 한꺼번에 다 하는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며 푸념하기도 했다. 그동안 X-33과 34는 다른 시험기가 먼저 챙겨가서 록히드 마틴의 실증기는 X-35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의 명칭이 꽤 유명해져서 정식 넘버링은 F-2X가 됐어야 했지만 F-35로 명칭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렇듯 앞서나간 보잉이었지만, 먼저 만든 보람도 없이 미 해군이 함상 착함 속도를 제한하고 귀환 무장 탑재량을 9,000파운드로 늘려버리는 바람에 보잉은 오히려 불이익을 봤다. 록히드 마틴 측은 설계를 변경할 수 있었으나, 실증기를 벌써 거의 다 만들어버린 보잉은 어쩔 수 없이 만든 그대로 제출하면서 중량 감소와 수평미익을 추가하겠다는 재설계안을 동봉하는 선에서 정리했다. 물론 JSF 사업단 측이 뒤늦게 요구조건을 변경한 것이기 때문에 보잉에게 공식적으로 패널티가 주어진 것은 없었으나, 기체 형상이 크게 바뀌는 문제이기 때문에 불이익이 정말 없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업 초반에는 먼저 실증기를 만들고 몇 차례의 시험 비행을 성공시키며 보잉이 우위를 점했지만, 수직이착륙에서 우위가 뒤집어지게 된다. 저렴함에 초점을 맞춘 보잉은 개발비를 줄이기 위해 이미 검증되었고 자기들이 만들어서 잘 알기도 한[* 미군용 AV-8은 보잉에서 제작했다.] 해리어의 단일 엔진-직접 분사 방식을 응용했으나, 해리어의 문제점인 초음속 비행이 불가능하단 점과 지면에 반사된 배기 가스가 에어 인테이크로 다시 들어가서 엔진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문제도 똑같이 일어났다. 물론 보잉도 예상했던 부분이라 재흡입되는 배기 가스를 찬 공기로 막아주는 제트 스크린 노즐을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이를 해결하느라 X-35보다 개발 일정이 뒤쳐졌다. 반면에 록히드 마틴의 X-35는 보다 복잡한 리프트 팬 시스템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기세가 올랐고, 수직이착륙용과 초음속 비행용 부품을 갈아끼워야 했던 X-32와 달리 수직이착륙과 초음속 비행을 한 번에 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테스트 비행장에서 [[워싱턴 D.C.]]까지 왕복하면서 의원들의 환심을 샀던 것은 덤. X-32에 비해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고, 양산형으로 이행할 때 변경해야 할 부분이 적은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이 초대형 사업은 2001년 10월 26일, 록히드 마틴의 X-35가 승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