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G42 (문단 편집) === 단점 === 그러나 FG42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가려다 여러가지 문제점을 낳고 말았다. 일단 자동소총, 분대지원화기, 저격소총의 3가지로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무기라는 것이 문제였다.[* 흔히 게임에서 올라운더의 단점이라 말하는 그것. 어느 역할이나 할 수 있기에 특출난 구석이 없다.] 분대지원화기라고 하기엔 지속사격 능력이 떨어지고, 반자동 사격시에는 기존에 쓰던 소총들에 비해 큰 메리트가 없으면서 가격이 훨씬 비쌌다. 즉, 총기계의 [[유틸리티 플레이어]]. 아무리 설계가 좋아서 반동이 적고 명중율이 좋다해도 1m도 안되는 짧은 길이를 지닌 주제에 소총탄을 초당 최대 15발씩 뿜어낼 수 있는 연사력을 가진 바람에 연발사격을 주로 쓰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결국 기본적으로는 주로 반자동 화기로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근거리 교전 상황 또는 위급 상황 및 분대 지원 상황에서만 자동 사격으로 운용하는 형태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후기형인 Ausf. G에서는 권총 손잡이를 채택하고 중량이 늘어났으며 반동제어용 컴펜세이터와 함께 연사속도를 750RPM으로 줄이는 등의 개량을 했지만 그런 후기형의 자동사격 명중률도 전투소총 중에서는 뛰어난 수준이었지만 [[StG44|본격적인 돌격소총]]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게다가 격발시 총구 화염과 소음도 심각했다. 이는 Ausf. G에서 컴펜세이터를 달아서 총구화염은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소음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자동사격을 고려해 양각대를 기본 장착한 것은 좋지만 위치와 기능에 문제가 있었다. 우선 힌지가 총열덮개 쪽에 붙어 있어서 뒤로 열리고 앞으로 접히는 구조였는데, 전개시 고정 기능이 없어서(!) 지면에 정확히 밀착하고 쏘지 않으면 반동으로 총이 뒤로 밀릴 때 양각대가 접혀버리기 일쑤였다는 것. 후기형은 양각대가 재설계되면서 힌지가 총구 가까이로 옮겨가 전개 방향이 반대가 되었고, 좌우 전개 폭도 넓어졌지만, 이 시점에선 StG44가 나오면서 강점을 거의 상실했다. 그리고 급탄을 총기의 상부도 아니고 하부도 아닌 측면(왼쪽)에서 하다 보니 총의 무게가 자연스레 쏠릴 수 밖에 없었다. 파지 자세도 툭 튀어나온 탄창 때문에 다소 어정쩡했다. 그래도 총기 자체의 신뢰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열, 냉기, 비, 흙이나 먼지 등에 강했으나, 진흙에는 취약하고 탄창의 내구도가 좋지 않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고급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FG 42의 생산성 문제는 구조적 문제보다는 재료 탓이 컸다. 오픈 볼트와 클로즈드 볼트를 혼용한 방식은 구조적으로 가스 피스톤에 방아쇠의 시어가 걸리는 위치를 다르게 하는 방식([[https://youtu.be/KdaUPUZXdSM|참고]])으로 구현하였기 때문에 악랄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총에 '''니켈-크롬 합금강'''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독일의 입장에서 니켈-크롬 합금강은 전차를 비롯한 고급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에도 벅찬 것이었다. 그래서 공군은 초도생산형을 사용한 일선의 반응을 바탕으로 개량할 것(양각대 위치 변경, 권총손잡이의 각도 변경, 개머리판의 소재 변경-철제에서 목제로- 등)을 요구하면서 이에 덧붙여서 총의 재료를 니켈-크롬 합금강에서 생산성이 훨씬 나은 망간강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는데, 망간강은 내마모 특성에서는 대체는 가능하지만 내식성과 경도 때문에 니켈-크롬을 완전히 대체하는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생산성의 향상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사실상 더 이상의 공수작전이 시행되지 않는 상황등을 고려한 설계변경을 거쳐 약 210정 가량의 중기형이 제조되어 주로 후기형을 위한 테스트배드로 사용되었다. 개량의 결과 후기형인 Ausf.G는 초기형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무겁고 견고해졌으며 생산성도 향상되어 하인리히-크리그호프사는 12만정의 생산주문을 받았으나 후속 생산능력의 문제로 다른 두 제조사에도 의뢰가 이루어졌다. 후기형인 Ausf.G는 1944년 11월에 첫 생산분이 나왔으나 이는 현장테스트를 위한 소수 양산에 그쳤고 본격적인 생산은 1945년 3월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몰락으로 인한 조악한 환경, 소련군의 진출에 의해 디에트리히사의 생산분이 500정으로 그치는등 우여곡절 끝에 후기형의 생산분은 6224정에 그쳤다.[* 그래도 적은 생산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전투]]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베트남 전쟁]] 중 [[베트남|북베트남]]에서 사용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