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IRA (문단 편집) === 옹호론 ===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 상당수에게는 [[애국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를 비롯한 이들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그렇게 따지자면 [[영국]]은 '''[[혐성국|테러 유발국가]]''' 아니던가?"라면서 옹호하는 경우도 많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건 현장을 '''지나갔던 젊은이가 히피 차림에 무직이고 행동이 모두 수상하니 닥치고 잡아가두고 고문하며 IRA라고 억지 자백을 유도하더니만 이게 안되자 무고한 그 피해자 제리 콘론의 아버지 주세페 콘론(1923~1980)까지 잡아와 [[연좌제]]를 벌였다.''' 그의 아들 제리 콘론(1954~2014)은 살아 생전인 2005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절대로 용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테러로 맞서지 않는다. 내가 테러를 저지른다면 그자들은 자신이 한 고문에 대한 정당성이나 확립할테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니까. 비폭력으로서 그들을 응징하고 알릴 것이다."라고 절대 잊지 않았...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거다. 제리의 어머니인 사라 콘론(1926~2008)도 "남편과 아들이 억울하게 잡히면서 저는 테러범의 아내와 어머니라고 돌팔매질을 당하며 지옥같은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라며 그녀 역시 몸과 마음 모두 죽도록 고생해야 했다. 더불어 제리나 사라는 "자신들은 테러로 맞서지 않으나, 이런 아픔을 가지고 IRA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욕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그렇게 된 배경을, 그들을 그저 테러범이라고 욕만 하는 이들은 알기나 합니까? 아니 관심이라도 있습니까?"라며 성토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1994)]]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실존 인물인 제리 콘론으로 열연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테러 활동의 근원은 영국의 억압적인 지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인들을 무고하게 잡아가둬서 몇 달 정도 구타하고 심문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놓고 도저히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야 풀어준 사례가 굉장히 많다. 고문 후유증이라든지 트라우마, 직장에서도 쫓겨나며 경제적인 타격이라든지 여러 모로 극심한 피해를 당하자 북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증오로 이를 갈며 IRA에 스스로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이로인해 가족의 복수를 한다며 [[소년병]]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시네이드 오코너가 옹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IRA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개신교]] 측에서 조직한 반IRA 폭력단체(예: UDA(얼스터 방위협회), UVF(얼스터 의용군))가 영국 정부의 비호하에 북아일랜드인들에게 폭력과 [[사적제재]], 살인을 일삼았다. UVF가 1974년에 벌인 더블린 폭탄 테러에서는 약 33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들이 죽인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 또한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IRA 측은 적어도 가능하다면 민간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사전 경고를 하거나, 테러의 목표도 일반적으로는 [[개신교]] 신자 친영파 민간인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왕립 경찰단, [[영국군]] 등의 '교전 상대'를 대상으로 설정했지만, UVF와 UDA 등의 친영파 계열의 무장 단체들은 교전 상대와 일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톨릭]]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장 희생자 비율만 봐도 IRA 측은 군대나 경찰, [[개신교]]계 민병대 등이 70%, 민간인이 30% 정도인 반면 [[개신교]]계 무장단체는 그 비율이 정반대이다. 분쟁기간 내내 친영파 무장집단들은 반영 민족주의파 무장집단중 가장 큰 PIRA는 커녕 훨씬 소수파인 마르크스주의 계열 INLA (Irish National Liberation Army 아일랜드 민족해방군) 같은 소규모 무장세력이랑 겨우 맞먹을 만큼의 세력밖에 없었고, 그나마 가장 숫자가 많은 얼스터 방위 협회(Ulster Defence Association)의 경우 구성원 태반은 사실 IRA의 무장투쟁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도 힘든 정치적으로 친영파 동네 어르신들의 친목회, 정치적 압력 집단으로 활동이 훨씬 컸다. 반면 개별 사건 차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영국군 주둔지, 얼스터 경찰서 등에 집중했던 IRA와 달리 [[https://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Ulster_Defence_Association_actions|태반이]] [[https://en.wikipedia.org/wiki/1993_Castlerock_killings|그냥]] [[https://en.wikipedia.org/wiki/Benny%27s_Bar_bombing|인근]] [[https://en.wikipedia.org/wiki/New_Lodge_Six_shooting|카톨릭 시민들이]] [[https://en.wikipedia.org/wiki/Paddy_Wilson_and_Irene_Andrews_killings|모이던]] [[https://en.wikipedia.org/wiki/Greysteel_massacre|술집]] 같은 순수한 민간인 상업 시설 등이다. 반영 무장단체나 친영 무장단체나 분쟁이 지리멸렬해지면서 마약 밀매 같은 그냥 범죄집단으로 전락하는 현상은 공통이라 해도 북아일랜드 사상 가장 심각한 연쇄살인 사건이며, 심지어 원래 이들이 속했던 친영파 무장단체 본인들도 고개를 저으며 손절하게 만들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Shankill_Butchers|션킬 도살자]] 사례도 있다. IRA가 많은 민간인을 죽인 건 사실이나, 말콤 서튼의 보고서에 따르면 친영파 무장단체에 의해 사살된 사람 중 85%가 민간인이었다. 반면 IRA는 약 35% 정도로, 적은 건 아니지만 친영파 무장단체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결국 따지고 보면 1970년대까지도 주거, 취업, 참정권에서 악질적으로 [[가톨릭]]계를 차별했던 스토어몬트의 [[개신교]]가 지배하던 [[북아일랜드]] 의회와 이를 철저히 방임했던 런던 [[영국 정부]]에 있다. [[북아일랜드]]는 1970년대까지도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가 아니라 보유한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력에서 게임이 안되는 [[가톨릭]]계가 정치적으로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러한 차별에 항거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68 혁명]]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피의 일요일 사건]]로 인하여 영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평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