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NL(정파) (문단 편집) == 형성 == 1980년대 초중반에 학생운동권에서 돌출한 [[사구체 논쟁]]을 통해 '''[[NLPDR]]''', 즉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주장하던 그룹은 세를 불려나가면서 [[제헌의회그룹|'''CA''']]와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김영환(1963)|김영환]]의 강철서신을 계기로 [[주체사상]]이 유입되는데,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과학적 변혁이론으로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생겨난다. 거기에 [[5.18 민주화운동|80년 광주]]의 충격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미국]]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져 '민족'적 가치에 호소하는 NL이 주류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NL계열은 대한민국을 '식민지반([[半]])봉건' 혹은 '식민지반([[半]])자본주의' 체제로 보았다.[* 여기서 반은 반대하는 것이 아닌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1987년 [[6.10 민주 항쟁]] 국면에서 '''직선제 개헌'''이란 아주 간단명료한 슬로건을 내세워서 폭넒은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면서, 대립하고 있던 [[제헌의회그룹|CA]]그룹의 일부[* 이들은 '비(非)[[주체사상|주사]]NL로 불리게 된다.]마저 흡수하면서 범NL계열은 엄청난 양적팽창과 함께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어 [[전대협]]과 [[한총련]]을 주도한다. 이후 '애국적 사회진출' 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과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다. 즉, NL 노선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사구체 논쟁부터가 "이 한국 땅에서 반정부/반독재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세를 파악해야 하는가"라는 고민거리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실, 한국에는 무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좌익운동은 물론 해방정국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여운형계 사회주의 운동,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 합법적인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던 혁신계 잔존세력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통일혁명당을 만들어서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거나, 혹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의 지하혁명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결국 6.25 전쟁의 여파 속에서 막강한 반공주의적 탄압으로 인하여 북한 쪽 공산당과 연계된 집단은 물론, 결과적으로 그와는 전혀 상관없던 (오늘날 사민주의와 비견될 만한) 온건 성향의 합법적 정치정당까지도 완전히 절멸되었다.[* 지금 와서는 새삼 상상하기 힘들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경상도 지역은 소위 '여당 성향 텃밭'이기는 커녕 상당한 진보주의적, 좌파주의적 대중적 지지기반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원래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진영이 강력한 곳이었다.] 결국, 서방 국가들의 현대정치사와 비슷한 궤적을 걸을 가능성이 있었던 이념정치의 토양이 사라져 버렸으나, 박정희 독재와 유신시대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대중적 저항의식을 심어 주었으니, 서양 국가들의 정치사에서 사회당, 사민당 등이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세대를 거쳐 저항이나 개혁의 구심점 노릇을 한 것과는 달리 그 시대의 한국의 활동가들에게는 (과거의 진보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이 절멸당해 버린 이래) 그러한 과거의 교범이 없었다. 따라서 [[사구체 논쟁]]의 형태로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이론, 이념에 따라 반정부, 반독재 투쟁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NL노선이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에서 돌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광주항쟁은 '''[[반미]]가 중요한 명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까지 재야와 대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 대다수는 '''미국을 박정희 정권의 폭주를 저지하는 고마운 우방'''으로 보았으며, "그나마 미국이 있으니 간신히 숨통이 트인다"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10월 유신|유신]] 말기의 [[지미 카터|카터 정권]]이 [[인권]]과 [[민주화]]를 중시하며 박정희 정부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민주화운동세력 내에선 북한에 대해서 통일을 이루어야할 같은 민족으로 대화와 협력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는 침략자 무리라는 반북, 반공 정서도 같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재야대통령으로 불리던 [[장준하]]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고, 유신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문익환]]과 [[계훈제]]는 미군 통역장교 출신으로 친미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외에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개신교 목사들의 상당수는 미국 유학파였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민주화시위대에서 ''''반공전선 이상없다, 김일성은 오판말라''''같은 플래카드를 들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언론의 자유, 공정선거, 인권, 서민층 권익 보장 같은 보편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수준이 대세였다.[* 참고로 1970년대까지 학생운동권들이 가장 많이 읽었다는 책이 바로 [[존 롤스]]의 '''정의론'''이었다.] 이외에 중남미에서 유래한 [[종속이론]] 등이 보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뀐다. [[카터 행정부]]가 심각한 지지율 하락으로 [[레임덕]]에 시달리는 와중에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하나회|신군부]]가 다시 정권을 틀어쥐는데,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혹은 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은 [[하나회|신군부]]의 과잉유혈진압을 사실상 방관하였고, 카터 이후에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을 미국에 초청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학생운동 그리고 재야민주화운동 내부에 반미 정서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 대장이 '한국인은 [[레밍]]' 운운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위컴 대장의 레밍발언의 내용은 '전두환 같은 독재자를 생각없이 찬양하고 떠받드는 한국인들이 있는데, 그런 인간들은 마치 레밍쥐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위컴을 인종차별주의자, 오만한 미제국주의자 등으로 까는 사람들이 많은데 명백하게 와전된 발언이다. '아메리카 트라우마'라는 문헌에서도 나오지만 위컴 대장은 개인적으로 전두환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또 리차드 워커 주한미대사는 1982년 <더 스테이트>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운동가들을 "버릇없는 아이들"이라 폄하한 바 있었다.][* 동 시기에 국무부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을 개처럼 까고 있었지만, 냉전 상황 속에서 한반도에 친미정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정책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부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실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때문에 김대중의 명줄을 잡고 있던 전두환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찌하던 그런 속사정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던 대학생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국놈들도 사실 다 똑같은 놈들이었어!!"'''라고 외치게 된다(…).][* [[http://m.kmib.co.kr/view.asp?arcid=0923541563|2016년 기사]]] 반미운동의 무풍지대 중 하나라던 대한민국에서 1982년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같은 반미 시위가 터져나오고, 민주화운동 진영 전반에 반미정서가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사들의 상당수가 이런 반미정서의 돌출에 불안감을 느끼고 침묵하거나 오히려 친정부적인 스탠스로 기울어진다. 대표적인게 [[윤보선]], [[천관우]], [[강원용]] 목사, [[지학순]] 주교. 바로 지금도 회자되는 윤천지강이다.] 이 시기 운동권에서 터트렸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어지간하면 '반미'라는 모토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반미정서가 고양되면서 민족주의가 타오르게 된다. 농민운동권 역시 1980년대 중반 수입개방을 기점으로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받자 반미 감정이 피어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적으로 반미운동의 무풍지대'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의 시대상은 '''미국 까기'''와 '''미국 옹호'''의 충돌 시대였다고 할 수도 있다. 1980년대서부터 시작하여 소련이 무너지는 1991년을 최정점으로 하며, 근래에는 '''조지고 부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대까지 이어졌던 대략 한 세대 동안의 기간은 사실상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같이 반미주의가 대한민국에 들끓던 시대였기 때문. 즉, 그 시대는 '''[[종속이론]]의 시대'''였으며, NL주의의 모든 핵심은 사실상 '''종속이론'''이 제시하는 '특수한 역할'을 한국 땅에서 NL주의자들이 새로 규정하고 정립한 저항이론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시작되기에 이른다. 1986년 필리핀 민주혁명을 기점으로 레이건 행정부가 '친미 범위 속 민주화' 기치를 담고 새로 만든 '저강도 전략'도 운동권들 사이에서 파급돼 반미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