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라테 (문단 편집) === 일본 본토에서의 발전 === [[류큐 제도]]가 일본의 정식 영토(내지)로 편입되기 전까지 [[류큐인]]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가라테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1900년대 들어 일본이 여러 전쟁을 겪으며 상무적인 사회 분위기가 되면서 [[검도]]와 [[유도]] 이외의 무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오키나와의 가라테 역시 주목을 받아 일본에 상륙하게 된다. 일본에 가라테를 전파한 사람은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 - 1957)이었는데,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해 부모가 열심히 운동을 해 몸을 단련하란 의미에서 스승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스승과 후나코시의 집은 거리가 20리나 되었는데, 수련이 금지되어 있어 밤에 몰래 수련하기 위해 제자는 한밤중에 10리를 달려가고, 스승도 10리를 달려와서 정확히 중간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수련했다고 한다. 만약 하루라도 빠지면 상대가 10리를 헛수고해서 달려온 게 되기에, 태풍이 오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 아파도 제자는 스승을 위해, 스승은 제자를 위해 단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는 감동스러운 --러브-- 스토리가 전해져 내려온다. 후나코시는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인들의 무술이 인정받게 되고자 가라테를 일본에 전파하게 되었고, [[1916년]]부터 본토에 진출하였다. 이때 중국 색채가 나는 '당(唐)'자를 빼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당(唐)은 당나라 건국 이래로 2차대전 종전까지도 중국을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때문에 위에 서술한 대로 중국에서 온 이름을 이때 고쳤다고 중국에서 까기도 한다.] [[게이오기주쿠대학]] 공수부 기록으로 1929년 혹은 1930년에 이름을 대일본 권법 공수도로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국민 스포츠이던 [[유도]] 강도관 도장에서 수련시간 외에 연구회가 처음 인정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승급체계나 도복 등, 유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1933년 대일본무덕회에서 일본 무술로 인정 받는다. 특히 쇼토칸 가라테는 타격기로 무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존 가라테에는 없던 발차기를 아들인 후나코시 요시타카가 사바테 등에서 적극 도입하고 연구해 1936년 부터 1946년 사이 [[돌려차기]], [[뒤차기]], [[옆차기]]의 세분화, 낚아차기[* 가라테식 뒤돌려차기로 1946년경 나카야마 마사토시가 중국에서 배워왔단 기록이 있다.], [[날아차기]], 이단앞차기[* 두발당성] 등이 도입된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v32oHSE5t6cC&dq=Yoshitaka+Funakoshi&pg=PA236&redir_esc=y#v=onepage&q=Yoshitaka%20Funakoshi&f=false][* 다만 앞차기 옆차기 두발당성 아시바라이 같은 기술들은 애초부터 가라테에 있던 기술들이다.] 그 이후 가라테는 쭉 발전하여 일본에서 검도, 유도의 뒤를 이어가는 주류 무술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일본의 대표적인 타격계 무술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어느 정도 유술기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업어치기 후 안면에 정권이나 다리걸기 등.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무술의 원형은 타격기와 유술기가 혼합된 형태였다. 일본 무도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무기를 든 상태를 상정하고 종종 직선적 킥으로 원거리 공격을 보조했다. 또, 근접 상태에서는 펀치가 아닌 유술기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형태였다. 고류 유술의 움직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유술로 대표되는 유도의 경우도 현재의 유도로 정립되기 이전에는 주먹과 발 기술이 있었으며, 심지어 스모조차 과거에는 타격기와 유술기 등을 가진 종합 무술에 가까운 형태였다. 사실 대부분의 무도는 태생을 따라 올라가면 모두 무기술 + 유술 + 타격기가 혼합된 형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각각이 하나의 종목으로 자리잡고 스포츠화 되면서, 다른 무술과의 차별화를 위해, 혹은 스포츠화를 위해 타격이나 유술 한 쪽으로만 발달하게 된 것이다. 가라테에 잡기보다는 치기가 많으나 그럼에도 카타에 유술기를 상정한 동작이 제법 존재하며 시합에서도 일정 부분 허용하는 까닭은 이러한 태생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youtube(lsU5Ei89Axc)] 가라테의 유술기를 볼 수 있는 영상으로 평안4단(平安四段)이라는 카타의 동작을 응용한 기술이다. 유파의 대표로 불리는 쇼토칸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카타이며, 유술기가 사실상 완전히 금지되었고 카타 역시 분해 교습을 등한시하는 극진의 각 분파에서도 동작 자체는 가르치고 있다 애초에 근대 공수도의 대부인 후나고시 기친이 저술한 가라테 교범에도 유술기 항목이 대거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youtube(nDs7RPboEO8)] 카타속 가라테 동작들의 모습이 현대의 [[종합격투기]]와 기타 유술기 무술들의 모습들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는 복원 영상. 물론 영상에 예시로써 등장하는 모든 선수들이 가라테 기술을 시전하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되겠지만, 기존의 오키나와 테의 실전성과 유술기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는 영상이다. [youtube(fpORlWgkGqo)] 하물며 스포츠화된 공수도 시합에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유술기를 활용하며 높은 점수를 준다. 료토 마치다도 저러한 특유의 리듬을 잘 활용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사실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일본 내에서 가라테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다. 유도가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신사적인 전통무도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가라테는 [[깡패]]들이나 수련하는 싸움이란 선입견이 강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가라테 영화에서도 제목을 무도로서의 가라테가 아니라 그냥 공수치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표현이 당시 한국에 흘러들어와 일부에서 '맨손치기'라는 용어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고우영]]화백의 작품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가라테 수련자들은 일본을 떠나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의 해외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가라테가 온전히 일본 무술로 받아들여지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이런 해외 수련자들 덕에 '외국에서 유명한 일본 무술'의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가라테연맹 본부부터가 스페인에 있다. 가라테에서 뻗어나온 무술이나 격투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무술이고, 룰과 커리큘럼을 수정한 [[극진공수도]]와, 이 극진공수도에 다시 룰을 수정해서 발전시킨 [[대도숙 공도]]와 [[무에타이]]의 요소와 결합시킨 [[킥복싱]] 등도 있다. 그 킥복싱에 다시 새로운 룰을 추가한 [[슛복싱]]도 따지고 보면 가라테의 증손자뻘 되는 셈. 물론 무술이나 격투기라는 게 룰 하나만 수정해도 완전히 다른 종목으로 바뀌며, 가라테 역시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발전을 거쳐온 만큼, 이들이 가라테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논리로 따지면 가라테도 [[오키나와 테]]라는 류큐국 무술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오키나와 테는 [[중국]] [[남권]]에서 나왔으니 결국 계보상 뿌리는 가라테가 아니라 중국 남권이다. 다만 가라테는 뚜렷한 체계를 갖춘 근현대의 단체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널리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