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사도 (문단 편집) ==== 생애 ==== 1213년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인 [[가섭]][* [[맹종정]], [[호재흥]]과 함께 항금명장 중 하나였고 회동 지역에서 금군을 막아냈으며, 산동의 충의군과 연계하여 중원 수복을 노리기도 했다.]은 전당현의 호씨라는 부녀자에게 눈독을 들였는데, 그녀를 납치해서 [[첩]]으로 만들었다. 그 호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가사도이다. 후일 가섭이 승진하자 그는 호씨를 버리고 가사도만 데려간다. 가섭은 1223년 가사도가 10살일 때 사망했고, 가사도의 친모인 호씨는 석장에게 재가한다.[* 나중에 가사도가 이를 빌미삼아 석장을 죽인다(...).] 그 뒤 가사도는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사암지에게서 비록 젊지만 그 재능은 매우 뛰어나서 국가를 위해 쓰일 것이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당시 송나라 조정에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이 하나 존재했는데 고위직이나 큰 공을 세운 관리의 자손에게는 일정한 관직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은음(恩蔭=[[음서]])이라 불렀으며 가사도도 이 은음을 통해 관직을 받기는 했으나 [[현]]의 양식창고를 담당하는 미관말직이었다. 하지만 1245년 명장 [[맹공]]이 암투병 도중 가사도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휘하인 [[이정지]][* 양회 전선에서 이단의 군대를 막고, 양양을 구원하고자 하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양주 지역에서 장렬한 전투를 벌인다.]에게 가사도를 소개한다. 이후 맹공은 남송의 황제 [[이종]]에게 가사도를 중용해 달라는 추천서를 보냈고 이종황제는 가사도를 바로 고위직인 감찰어사로 임명했다. 이후 맹공이 죽자 가사도는 맹공의 후임 경호제치사가 된다. 또한 가사도의 누이도 [[이종]]의 후궁이 되면서 가사도는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게다가 송대 고위관료의 필수요소인 예술품 수집광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술품 덕후였던 [[이종]]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1259년(개경 원년) [[쿠빌라이]]의 군대가 남송을 침략한다. 조어성에서의 몽골군은 몽케 칸이 죽자 철수했지만 쿠빌라이의 군대는 악주를 공격했다. 이때 악주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악주에서 [[장승(남송)|장승]]이 이끄는 군대가 몽골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남송군 대부분은 사천 방면을 원조하고 있었다. [[여문신]][* 여문덕의 아우로, 1275년 원의 군대와 맞서다 죽었던 여문신과 동명이인이다.]은 몽골군의 장영실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승은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겠다고 한 뒤, 쿠빌라이가 군대를 물리자 장승은 민가를 철거하는 등 성의 방어를 견고히 했다. 이후 [[고달(남송)|고달]]이 강릉에서 지원을 온 뒤 몽골군이 공격해 오지만, 역으로 고달이 계략으로 몽골군의 공언휘를 주살하는 등 악주에서 몽골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해 9월 28일 이종은 가사도를 우승상으로 삼아 악주를 구원하게 하였고, 중경에 있던 [[여문덕]]의 군대[* [[조어성 전투]] 때 조어성을 구하기 위해 조어성으로 향했으나, [[사천택]]에 의해 가로막혀 중경으로 되돌아왔다.]도 악주로 향하였다. 이날 이종은 가사도를 황주로 돌진시켜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는 7백 기수를 거느리고 [[손호신]], [[장세걸]], [[범문호]]를 대동하고 황주까지 진격시키는 데 성공하여, 송군은 사기를 크게 떨쳤다. 몽골군이 성을 에워싸는 동안 쿠빌라이는 [[장유]][* 장홍범의 아버지로, 1차 [[몽송전쟁]] 때 송군과 싸웠다.]의 군대로 하여금 거위차를 만들고 굴을 파서 입성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악주[* 오늘날 [[우한]]]에서 방어전을 총 지휘하였고, 악주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악주는 남송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다. 몽골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 남송을 동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악주는 서쪽으로는 사천, 북쪽으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는 양회 전선을 지원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전에도 [[악비]]의 악가군이 중원을 회복하기 위해 이 곳에 주둔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와중에 쿠빌라이에게 재능을 칭찬받았을 정도였다.[* 하루아침에 악주성 주위에 목책을 쌓았다.] 그러나 성 내 사상자가 1만 3천에 달하였고 [[악주 전투]] 초기에 맹활약했던 장승이 전사하는 등 대부분 전황이 남송군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는지[* 하지만 몽골군도 역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는 독단적으로 [[쿠빌라이 칸]]에게 군대를 물리면 공물을 바칠 것이라는 밀서를 보냈고 쿠빌라이는 [[몽케 칸]]이 합주 조어성[* 오늘날 충칭 허촨 구]을 공략하던 도중 병으로 급사하여 자신의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가 자신을 몰아내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사도와 [[밀약]]을 맺고 철수한다.[* 악주 화약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학자들도 논쟁이 많은데, 가사도가 화의를 제안하였고 가사도의 재능을 인정했던 쿠빌라이가 이를 수락했던 것인지 아니면 대칸 승계 문제로 철수해야 했던 쿠빌라이가 철군하는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기 위해 제시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한다.][* 진순신의 저서인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고 쿠빌라이가 철군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게 하기 위해 수많은 골동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했다고 한다.] 가사도는 [[밀약]]대로 후퇴하는 쿠빌라이의 군대의 최후미 일부만 공격하는 시늉을 한 뒤[* 170개의 수급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자신이 악주에서 쿠빌라이를 격퇴하여 [[장강]]([[양쯔강]]) 일대의 몽골군을 몰아냈다고 부풀려 보고를 했는데, 송 이종은 가사도의 장계를 믿었고 수도에 입성하여 화려한 열병식 치루며 환대하였고 이후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며 칭송하며 그 공적으로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복화편"을 지어, 자신이 몽골군을 물리친 공을 칭송했다. 이후 12월에는 숙국공으로 봉해진다. 그 후 1261년에는 공전법을 시행하고, 태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송신같은 환관과 사씨 등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는 한편,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하는 타산법을 실행하는 등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가사도 자신이 [[악주 전투]]에서 부패한 장병들을 목격하였는지, 국경의 실태를 잘 파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사도가 실행한 개혁정책은 당시 지배층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어서 남송이 망한 뒤, 그들은 가사도를 졸장, 간신으로 매도했다.] 1261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쿠빌라이가 사신을 보내 밀약에 따르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쿠빌라이를 물러내기 위한 가짜 약속이었던 만큼 그럴 생각이 없던 가사도가 [[학경]]을 그대로 억류하였다.[* 진주에 억류되었고, 학경은 가사도가 정가주에서 대패하는 1275년에 풀려나나 그 해 죽고 만다.][* 학경을 실질적으로 억류한 것은 나중에 원군과 장렬한 투쟁을 벌인 [[이정지]]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유정(원나라)|유정]]이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를 받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임명되자 이에 불안을 느끼고 노주를 바쳐 몽골 제국에 투항했음에도 아무 조치가 없었다. 1263년 권신 [[정대전]]이 실각될까봐 몽골 침공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결재를 올렸는데 이것이 수리되었고 영웅이었던 그는 바로 재상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국경 수비대장의 지위도 유지되어 문관/무관을 전부 장악해 더 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1264년 이종이 승하하고 [[송도종]]이 즉위했는데 도종은 전임황제보다 더 멍청한 인물이라서[* 기록을 보면 [[사마충]] 정도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사도는 이 황제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국정을 전횡했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문천상]]과 같은 정적이 될만한 인물을 괴롭혔으며 애첩들과 함께 [[귀뚜라미 싸움]]을 붙이며 놀기 좋아하는 등 여러 놀이를 즐겼다. 이후 몽골이 본격적으로 쳐들어왔음에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장수[* [[고달(남송)|고달]], [[이정지]] 등]에게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가사도 본인도 원군을 보내기는 했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고, 무엇보다 가사도가 보냈던 [[범문호]]가 술만 마시고 여자들과 놀았으며, 이로 인해 이정지와 불화를 빚으며 입으로만 충성을 외치는 등 [[양양 공방전]]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그 전 이정지가 경호제치사로 임명되자, 전전부지휘사로 있었던 범문호 본인이 몽골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하였고, 가사도는 범문호에게 이정지의 명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였다.][* 또한 여문환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것을 꺼렸다. 여문환은 고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황이 남송군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여문환은 양양성에서 적을 잘 막고 있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변방에서 급보가 전해지자 가사도는 송 도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북쪽의 적은 이미 퇴각한 지 오래이옵니다. 폐하께옵서는 이를 누구에게 들으셨사옵니까? 송 도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느 궁녀가 그리 이야기했소. 가사도는 그 궁녀를 죽였다. 양양 함락 후 게다가 악주까지 함락되는 데 이어 거기다가 장강 일대를 지키던 무장들 대다수[* 대부분이 여씨 문중이라, [[여문환]]을 본 것과 여문환의 권유로 투항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부 유튜버나 학자들은 이들이 여문환이 그렇게 지원을 외쳤으나 중앙정부가 이들을 버린 것에 대한 분노로 그냥 투항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튼 대표적인 인물이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가 원에 투항하였고 이 투항한 이들이 맡던 지역 중 요충지였던 곳도 있었다. 이에 태학생들은 가사도가 전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가사도는 부득이하게 임안에 도독부를 설치했다. 그는 [[유정(원나라)|유정]]이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출전하기 꺼렸다. 그러나 유정이 죽자 출전에 나서게 되었다. 가사도는 이에 기뻐했다.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그래서 표를 올려 출사하여 각지의 정예 병사를 불러모았는데, 금백의 치중을 실은 배는 머리와 꼬리가 100여 리에 달했다.안길에 도착하자, 가사도가 탄 배가 물보라에 좌초되었고, 유사용은 천 명을 이끌고 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다른 배로 갈아타고 떠났다. 이후 무호에 이르러 송경을 사신으로 보내 바얀에게 거의 굴복에 가까운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바린 바얀|바얀]]에게 거절당하고 몽골군과 맞서게 된다. 그는 손호신의 군대를 전방에 주둔시켰고, 자신은 [[하귀]]와 함께 후방에 주둔했다.[* 하귀는 [[정가주 전투]] 이전, 양라보에서 아술의 군대에게 패했고, 악주에서도 원나라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여기서 [[하귀]]는 합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여 소매 속에서 편서를 꺼내 가사도에게 보여주며 '송의 역사가 3백20년 만에 끝난다.'고 보여 주었고 가사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가주(丁家洲)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으나 가짜 전공으로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는 대참패하고 한방에 병력이 날아가, 남송의 최후가 사실상 결정되었다. 단, 송 멸망이 확정된 것은 이전 남송 최중요 전략거점이었던 [[양양 공방전]]에서 패배한 것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의 주장대로 양양-번성 라인을 먹기만 하면 굳이 송이 막대한 재정을 투자해 구축한 방어라인을 진격할 이유도 없었고 더욱이 수도로 바로 진격이 가능하였기에 몽골제국군이 아무런 이유없이 제4차 [[양양 공방전]]에 무려 '''4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공방을 벌였을 이유가 없다.] 전투 과정은 이렇다. 바얀이 남송군의 방어선이 견고한 것을 보고, 뗏목을 만들었다가 다시 태우는 등 송군의 방심을 유도했다. 남송군이 방심한 틈을 타 장강 양면에 군대를 배치하는 등 남송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원군이 포를 쏘고 또 심리전으로 송군을 혼란시키자, 이에 [[강재(남송)|강재]][* 나중에 이정지와 함께 순국하는 장수이다.]가 전열을 정비하고 싸우던 도중 원나라군의 지속되는 교란작전과 송나라 장수들의 도주로 완전 붕괴되었고[* 당시 원나라군은 '''"송군이 무너졌다!"'''라고 외치면서 남송군을 교란시켰고, 손호신이 자신의 애첩을 데리고 도망가는 등 자중지란이 계속되었다.], 가사도 본인은 군사들을 수습하지 못했다. 가사도의 군대가 하귀와 함께 노항에 주둔하던 중 2월 19일 밤 [[손호신]]이 송군의 패배를 보고하자, 가사도는 황급히 나타나 크게 외쳤다. >손호신이 패했다고? 그 뒤 하귀에게 의사 소집을 명하였다. 이후 손호신이 가사도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가슴을 치며 흐느꼈다. 그 뒤 하귀는 가사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서 어가를 보필하라고 한 뒤 회서 지역으로 도주했다. >손호신: 저의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는 자가 단 한명도 없었사옵니다. >가사도: 이를 어떻게 해야 하오? >하귀:각 군이 이미 겁을 먹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양주에 가서 궤멸된 군사를 모집하고, 해상으로 황제를 보호하러 가십시오. 그래야 저는 회서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사도는 손호신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양주로 달려갔다. 다음날 송나라의 패잔병이 강을 따라 내려가자 가사도는 사람을 해안으로 보내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지만 패잔병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가사도를 욕한다. 가사도는 각 군에 격문을 보내 해상으로 가서 황제를 보호하게 하고 천도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각 군수는 모두 도망쳤고, 가사도는 양주로 들어갔다.[* [[정가주 전투]]에서 애첩을 데리고 도망간 손호신은 전투 이후 장세걸과 함께 원군과 싸웠고 그 해 9월 사망한다.] 결국 패전 뒤 강제로 조정에 소환된 다음, 승상 [[진의중]]이 탄핵을 주장하였고, 사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신들이 찬성을 하여 [[공종(송)|공종]]은 [[진의중]]의 탄핵결재를 받아들였다. 가사도는 파직되어 유배길에 오르던 도중 장주 목회암에 이르렀을 때 회계 현위 정호신에게 독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