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야금 (문단 편집) == 역사 == [[가야]]의 전신 [[변한]] 지역인 창원 다호리 유적지를 비롯해 영남 여러 지역에서 거문고 판과 비슷한 목판 유물이 출토됐는데, 이 현악기를 가야금의 원형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다.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역시 [[삼국사기]]. 가야금은 [[거문고]], [[향비파]]와 함께 [[신라삼현]]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야금을 만든 사람은 [[우륵]]이라고 생각하고, [[김훈(소설가)|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도 우륵이 가야금을 제작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기록에도 [[우륵]]이 가야금을 직접 제작했다고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야]]의 임금 [[가실왕]]이 [[중국]]의 [[쟁]][* 옛 중국의 악기로, 가야금과 비슷하게 안족으로 현 여러 개를 얹었다. 가야금과 달리 무릎에 얹지 않고 바닥에 놓고 탄다.]을 본 따 제작했다. 우륵은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가야금곡'을 만들어 바친 인물이다.'''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풍속통』에서 "쟁은 진(秦)나라 악기다."라 하였고, 『석명(釋名)』에서는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소리가 쟁쟁하며 병(幷), 양(梁) 두 주(州)의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부현(傅玄)은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六合)을 모방한 것이고,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이니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 하였다. 완우(阮瑀)는 "쟁의 길이는 6자이니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현은 12줄이니 이는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三才, 천ㆍ지ㆍ인)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악(樂)''' 그러나 [[국립국악원]]의 연구에 의하면 가야금은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본 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중국 역사서 [[정사 삼국지]]에서 [[변진]](弁辰)의 현악기가 기록되어 있고, 가야금 등장 이전 사람인 [[물계자]]와 [[백결선생]]이 금(琴)을 뜯었다는 기록이 있고, 가야금 등장 이전 시대 양식의 [[신라]] 토우(土偶) 중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를 타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가야금]]은 기존부터 있던 [[한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을 참고하여 발전했을 뿐, 중국의 쟁을 본 딴 것이 아니라고 한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50513/8189320/1|#]] [[http://luckcrow.egloos.com/2485649|#]]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가야가 망하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에 귀순하여 당시 왕인 [[진흥왕]]에게 받아달라고 했다. 가야의 음악은 [[망국지음]](나라를 망하게 한 음악)이라고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으나, 진흥왕은 "가야가 쇠한 것은 가야 왕이 음란해서 그렇지 음악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우륵에게 집과 땅까지 주어가며 편히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법지, 계고, 만덕을 보내서 우륵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우륵의 가야금곡 11곡을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다."'''라고 말하면서 5곡으로 뜯어 고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물론 우륵은 처음엔 화를 냈지만 다 듣고는 "즐겁지만 난잡하지 않고(樂而不流)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다(哀而不悲)." 하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악기가 정악 가야금. 산조 가야금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민속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가야금 [[산조]]가 발달하자 그에 맞게 정악 가야금을 개량했다고 여긴다. || [[파일:신라 가야금.jpg|width=100%]] || || 일본 왕실 보물창고 정창원이 소장한 가야금 || 현대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시대 가야금이 [[일본]]의 [[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신라고'''(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정창원 신라금]] 참고. 이렇게 가야금은 가야를 정복한 신라를 거쳐 현대 대한민국까지 이어졌다. 정작 신라에서도 신라금이라는 조금 다른 자국의 금(琴)이 었었는데도 가야금만 쭉 현대까지 이어짐은 얄궂은 일이다. [[삼국시대]] 내내 비교적 존재감이 약한 가야였지만 [[국악]]계에서는 독보적인 영향을 남긴 셈. 동아시아 전통 발현악기들 중에서는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가야금의 안족 역할에 해당하는 부품을 설치하는 방식. 이는 해당 악기들이 [[쟁]]의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쟁에서 파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전자 가야금도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