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타카나 (문단 편집) === 한국기원설 === || [youtube(NAmSeCq-v-E)] || [[한국]]에서 유명한 설로는, [[히로시마대학]] [[https://ja.wikipedia.org/wiki/%E5%B0%8F%E6%9E%97%E8%8A%B3%E8%A6%8F|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명예교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가타카나의 제작 원리가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26105.html|‘가타카나 신라 유래설’ 제기한 일본 학자…“신라 입말 표기 ‘각필’ 볼수록 확신”]] [[고바야시 요시노리]] 교수는 각필[* 뾰족한 물체로 종이에 작은 글자 자국을 새기는 기록 방법] 연구의 선구자로서 2019년에는 각필 연구가 인정받아 [[일본 정부]]에 의하여 문화 공로자로 선정될 정도의 권위자인데, 가타카나의 제자 원리 자체는 각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주장이다.[* 문화 공로자 선정 기념으로 행해진 2019년의 [[히로시마대학]]의 [[https://www.hiroshima-u.ac.jp/koho_press/press/2019/bunkakourousha|인터뷰]]를 보면 각필 문화는 [[중국]], [[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본 인터뷰에서 고바야시 교수는 가타카나와 유사한 사례로서 [[고려]] 시대의 [[구결]]을 언급하고 있다. 단 여기서는 아래에서 서술되는 신라 시대 기원설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고바야시 교수가 해당 설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으로서 꽤 오래되었는데, 2002년의 [[https://home.hiroshima-u.ac.jp/forum/34-1/hirakareta.html|에세이 투고]]를 확인하자면, 가타카나처럼 한자의 일부를 떼다가 발음기호로 삼는 원리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일본 학계의 정설(定説)을 부정하고, [[불교]]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통해서 전래되었고 고려 시대의 [[구결]]처럼 가타카나와 유사한 형식으로 사용된 문자가 있으니, 선후 관계를 보자면 한국의 삼국 시대에서 먼저 그런 방법을 쓴 것 같은데 실증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후 2013년 고바야시 교수와 [[동국대학교]] 연구진은 가타카나의 조성원리와 기호가 통일 신라의 각필([[요미가나]])에서 먼저 사용됨을 발견하였다. 풀어 쓰자면 [[헤이안 시대]]보다 앞선 740년경 일본에 전달된 불경[* [[신라 대방광불화엄경|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서 발견된 360여 개의 각필구결 문자가 가타카나의 조성 원리와 같다는 것이고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0903/57405148/1|#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5&aid=0002940893|#2]] 이와 같이 '한자의 일부분을 딴 기호를 발음기호로 재활용하는 방법'이 740년경에 이미 존재하였다면 그 이후에 만들어지고 널리 퍼진 헤이안 시대의 가타카나 제자 원리 또한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가설이다. 실제로 고바야시 교수는 "한자를 축약해 만든 가타카나의 근원이 한반도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말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30902035800073|日학자 "일본 문자 가타카나 신라서 유래 가능성"]] 하지만, 가타카나의 기원이 한국이라든가, 신라의 각필이 일본의 가타카나의 근원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아직 가설의 영역일 뿐이다. 고바야시 교수 자체는 각필 전문 학자지 가타카나 전문 학자가 아니고 고바야시 교수가 해당 학설을 주장한 것은 이미 20년 이상이 넘었음에도 이를 계승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데, 고바야시 교수가 전제한 정설(定説) 즉, '한자를 생략해서 발음기호로 쓰는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는 이론이 이미 학계에서는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바야시 교수도 언급한 고려 시대의 [[구결]]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 외 다수의 나라에서 가타카나 혹은 구결과 같은 원리로 한자를 생략하여 발음기호를 사용한 사례가 다수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중국 내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발음기호를 사용한 사례가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한자를 생략해 발음기호로 쓴다'는 원리는 일본 고유의 것도 아니고 신라 같은 한반도 국가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고대 동아시아 내부에서 널리 퍼진 일종의 공유지(共有知)였던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된 것이다. 다음은 그의 인터뷰 중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 日本の古代文化に影響を与えたのは中国ですから、中国にも角筆文献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のです。そこで1985年、北京に設立された日本学研究センターに客員教授として招かれた機会に蘭州を訪れ、2000年前の漢時代の墓から出土した木簡「武威漢簡」に角筆の跡と思われるくぼみを確認しました。その後、敦煌文書や宋代の木版一切経の経典のほか明代、清代の文献からも角筆の書き入れを発見しました。 >ならば日本が大陸文化を取り入れる経路となった朝鮮半島にもあ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2000年に初めてソウルの主な大学図書館と博物館に調査に行ったところ、11世紀の初雕高麗版から、日本のヲコト点にあたる「点吐」と仮名に当たる「字吐」が角筆で書き入れられていることを初めて見つけました。13世紀以降の文献にも見いだされ、韓国でも角筆が使われたことが明らかになりました。東アジアの漢字文化圏で主に漢文を読み解くのに角筆が使われ、交流も行われたことが分かってきたのです。 > 일본의 고대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에도 각필 문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그래서 1985년 베이징에 설립된 일본학연구센터에 객원교수로 초빙된 기회에 란저우를 방문하여 2000년 전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목간 '무위한간'에 각필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덩이를 확인하였습니다.이후 둔황문서와 송대 목판일체경 경전 외에 명대, 청대 문헌에서도 각필의 기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대륙문화를 도입하는 경로가 된 한반도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2000년에 처음으로 서울의 주요 대학도서관과 박물관에 조사하러 갔더니 11세기의 초조 고려판에서 일본의 요코토점에 해당하는 '점토'와 가명에 해당하는 '자토'가 각필로 써져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습니다.13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도 발견되어 한국에서도 각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주로 한문을 읽는 데 각필이 사용되고 교류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https://www.hiroshima-u.ac.jp/koho_press/press/2019/bunkakourousha|링크]] 그의 인터뷰에서도 알수 있듯이, 구결과 가타가나는 신라와 왜의 전유물은 아니었으며, 이 두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인 중국 한나라 시절에도 이러한 모양의 한자 축약형 각필이 있었다고 한다. 2013년 고바야시 교수의 연구 성과는, 그런 제자 원리가 한국에서 유래했을 것이지만 실증적 증거가 없다는 2002년의 추론을 보완하는 성격으로서, 헤이안 시대보다 빠른 시기에서 한국에서 한자를 생략해서 썼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다만, 일본 내에서는 740년경보다 빠른 시기에 생성된 문헌 자료에서 가타카나의 원형이 다수 발견되었기에 고바야시 교수의 주장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파일:isigami05.jpg]] 大山五十戸造ム下阝知ツ라고 적힌 4번 목간의 왼쪽 문장의 ム下阝知ツ에서 무(ム), 츠(ツ) 뿐만 아니라 部의 방인 阝만 떼다가 쓴 가타카나의 원형이 확인된다.([[https://www.gensetsu.com/021123isigami/doc7.htm|출처]]) 예를 들어 2009년 발굴 조사가 종료된 [[나라현]] 지방의 이시가미 유적(石神遺跡)에서는 665년(乙丑년)에 작성된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해당 목간에서는 무(ム), 츠(ツ)같은 가타카나의 초기 형태 뿐만 아니라 ム下阝知ツ처럼 部의 방인 阝만 떼어다 쓰는 용례가 이미 보이고 있으며, ム下阝知ツ는 [[https://www.gensetsu.com/03isigami1/doc4.htm|むげべめちつ]]라고 읽으며 호적에 기록된 문구인 만큼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시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아스카 시대]]의 가타카나 사용이 신라에서 전해진 대방광불화엄경보다 빠르다. 위의 논지와는 별개로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구결과 가타가나와 비교 했을때, 구결에서 나타나는 다음성(多音性)이 단음성(單音性)의 성향을 갖는 가타가나의 프로토타입이라고 언어학적인 분석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1Q1KbUOKw&ab_channel=%ED%96%A5%EB%AC%B8%EC%B2%9C%E2%80%93%EA%B8%80%EA%B3%BC%EC%9A%B8%EB%A6%BC%EC%9D%98%EC%83%98|링크]] 고대 동아시아에서 고유 언어를 가진 각 민족이 [[한자]]를 생략하는 형식으로 제 고유의 발음을 표기하는 점은 공통된 현상으로서, 특정 민족이나 국가가 독점하는 성격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고바야시 교수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이러한 표기법이 불교 문화와 함께 전수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그 루트를 중국 -> 한국 -> 일본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보빈]]의 연구를 보면 일부 문자의 표기나 발음 등을 살펴 볼 때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신라의 구결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현재 실증 가능한 수준에서도 가능성이 있다. '한자를 간략화해 자국어의 발음기호로 활용한다'라는 고중세 동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 비슷한 시기에 동시발생하였다 하더라도 각 지역 간 교류 과정에서 영향을 주고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가타카나와 구결의 관계도 그러한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빈은 둘 사이의 형태적 유사성이 발견될 뿐 아니라 가타카나 중 발음 매칭의 근거를 찾기 어려운 일부 문자가 구결을 경유하면 설명이 가능해지는 점 등을 들어 구결이 가타카나에 영향을 준 바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