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 (문단 편집) === [[의화]]에 관하여 === 이 부분은 상당히 길고 난해한 주제이므로 따로 서술한다. [[개신교]]와 갈라진 교리적 원인 중의 하나로 신앙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이신칭의]](칭의론)라고 해서, 오직 은총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 있다고 하며 이를 '칭의'라고 한다. 반면 가톨릭은 은총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주장하며 이를 '의화'라고 부른다. 단순히 칭함받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 의로운 자라고 불러주시면 그대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따로 의롭다고 ‘칭함 받음’이라고 구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이다.]이기 때문에 은총을 보존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인 뒤따르는 선행,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4대교리 중 하나가 바로 '상선벌악'. [[개신교]]에서의 선행의 의미는 '구원받은 자로서 행해야 하는 의무' 혹은 '구원받은 자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위'에 가깝다. [[유교]]식 표현으로는 '극기복례'를 일부 말하는 셈.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개신교]]에서는 몸(행위)과 마음(믿음)을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반해 가톨릭은 선행을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를 믿음과 이분법적으로 딱딱 분리하지 않는 이유는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주류 중 하나인 칼뱅파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긍정하기 때문이다. [* 몇 번이고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인간이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자유의지로 은총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이고 본인의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것에는 계명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는 등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인간의 공덕 그 자체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행위구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선 하느님이 내려주는 은총이야말로 구원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어떻게 보면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신학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물론 존 웨슬리는 기본적으로 루터식 이신칭의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결은 많이 다르다. 감리회와 가톨릭 둘 다 선재은총을 강조하지만 가톨릭 의화교리는 그 이후 인간이 응답을 통해 은총을 받아들인다는 과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반면 존 웨슬리는 칭의 과정에서 '인간의 응답'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의 선재은총 자체가 인간에게 그대로 작용하시어 스스로 죄인임을 느끼게 하고 칭의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과정적인 측면은 칭의 이후 중생과 성화와 관련해서 더 중요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보수 개신교 신학자 특히 칼뱅파 복음주의자들이 가톨릭 의화교리를 세미펠라기우스주의라고 까는 것도 가톨릭 신학 측면에선 상당히 억울한 것이 가톨릭 구원관 역시 구원은 무조건 하느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며 다만 그 은총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다거나 선행에 소홀하고 악에 빠져 살다가 잃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뿐이다. 다시 설명하면 의화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100% 이루어지지만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인 선한 행위가 그 의를 잃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뿐이다. 애초에 교회론과 성사론 등이 달라서 구원관의 타협이란 불가능하긴 한데 그렇다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라고 까는 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 본인을 이단이라 정죄한 게 보편교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신교]]에서 칭의-성화-영화라고 해서 구원의 3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가지고 첫 걸음을 떼기위한 '칭의'를 강조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해진다는 [[면벌부]]가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자캐오(삭개오). 그는 회개한 이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이야기하였다. 즉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므로 면죄부 따위를 구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게 되는데, 통회란 스스로의 잘못을 '''아파하는''' 것이다. 이 통회를 단지 성당이나 교회에 나와서 "[[할렐루야]]~ 나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했으니 앞으로 반성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엉터리다. '''결국 따지고 보면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 받는다는 기본 교리는 똑같고 사소한 표현과 관점의 차이인데, 개신교 일각에서는 가톨릭이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며 끊임없이 왜곡된 음해와 비방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데에 중요한 것이냐의 문제로서 행위구원론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개신교 주류의 뿌리인 칼뱅파의 예정설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산다. 물론 원죄 이후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는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도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받아들이는 부분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측면에서의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이다.] 1999년, 가톨릭과 [[루터교회]]가 "의화(칭의)는[* 의화와 칭의는 한자어에서는 다르지만, 영어로는 어차피 둘 다 justification으로 어휘 자체는 동일하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이며 이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이것의 실현을 위해 믿음의 징표인 선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구원관에 합의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2006년 [[감리회]]가 이 공동선언에 동참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외형적으로나마 점차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화해와 일치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매우 지엽적인 사건.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루터회 전체와의 합의가 아니다. 루터회 세계 연맹과만 합의가 이루어 졌고 이에 속하지 않은 미주리 시노드 등은 당연히 서명 안했다. 외려 모든 감리회가 소속된 WMC가 합의했다는 점에서 감리회 전체와 합의가 이루어진 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관련하여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루카 복음]] 22:37~40, 공동번역성서)"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게 둘 다 중요하다는 것.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까. 결국 가톨릭이 '행위 구원론'을 민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서 구원은 '''오직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의 응답이라는 관점에서는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개신교도 공유하는 가르침이다. >2006 일반적으로, ‘공로’(meritum)라는 말은 공동체나 사회가 그 구성원의 행실에 대해 마땅히 주는 보상을 가리킨다. 그것이 선행일 때는 상이 주어지고, 악행일 때는 벌이 주어진다. 공로는 정의의 덕과 관계되며 정의의 원리인 공평에 상응하는 것이다. > >2007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창조주께 받았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 >2008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공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은총에 협력하도록 자유로이 안배하셨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하느님의 어버이다운 활동은 인간을 감도하심으로써 시작되며, 반면에 협력을 통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실은 그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려야 하고, 그다음으로 신앙인에게 돌려야 한다. 실제로 인간의 공로 자체도 당연히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데, 인간의 선행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주도와 도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인간공로를 이해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공로가 불가능한 영역'''과, '''피조물의 공로는 유비적인 의미에서 공로라 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공로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성화은총에 의하여 인간이 동등하지 못한 수준에서 유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진정한 상대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상대자가 된 것은 인간의 독립된 지위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서이다. 이로써 공로의 교리는 구속된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긍정하는 셈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 >-가톨릭 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4260&keyword=%EA%B3%B5%EB%A1%9C&gubun=01|'공로']] 문서 >사실 의화는 '''오로지 은총'''만에 의하여 이루어지되 인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신앙'''만이 의화시키나 진정한 신앙에는 선행이 없지 않다. 의화는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면서도 일생에 걸친 과정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수 없으나 성서는 공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 >-가톨릭 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781&keyword=%EC%9D%98%ED%99%94&gubun=01|'의화']] 문서 >은총은 선물이니만큼 어떤 강요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신 인간의 반응과 관게없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은총에는 증여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은총은 당사자의 일방이 자기 재산을 무상으로 상대분에게 줄 의사를 표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은총 문제에 있어서는 그 차원과 성격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입장과 동시에 인간의 입장도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계시되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 >-가톨릭 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763&keyword=%EC%A6%9D%EC%97%AC&gubun=01|'은총론']] 문서 >'''예를 들어 장애인용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는 자기 힘만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 그러나 그 환자 곁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이 그의 의자를 밀어주면서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준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이 경우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으로써는 일으킬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자신이 운반되는 것에 동의하는 일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은총 질서 속에서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놓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드러나는 수동형 동사(''dejarse amar: 자신을 내어놓는 것'')는 구원 질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역할을 보여주는 데 있어 능동적인 표현보다 훨씬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수동형은 구원 질서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순전히 '수용적'(受容的)이라는 점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무엇을 생산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은총론》, 윤주현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283쪽[*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의 두 교수인 M.Flick과 Z.Alszeghy의 견해를 소개하는 부분.] 엄밀한 의미에서는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 공로를 부정한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 공로가 가능하다고 가톨릭이 말할 때는, '''유비적(類比的, analogous)''' 의미에서 공로라고 불리는 것이지 '''일의적(一義的, univocal)''' 의미에서의 공로가 아니다. 물론 '''다의적(多義的, equivocal)''' 의미에서의 공로도 아니다.[* 유비(類比)란, 일의(一義)도 다의(多義)도 아닌 개념으로, 가령 "A는 얼굴이 예쁘다"와 "A는 마음씨가 예쁘다"에서 두 문장의 '예쁘다'라는 말은 일의적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의적인 것도 아니며, 서로 다르면서도 어떤 같은 근거 때문에 같은 표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 '유비'가 성립한다. 또다른 예시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유(有)(라틴어: ens, 영어: being)를 일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유와 인간의 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범신론이 성립한다. 반대로 유를 다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유와 인간의 유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감각적·물질적 인식에서 초감각적·비물질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므로, 불가지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 학파 학자들은 유의 일의성과 다의성을 거부하고 유의 유비성을 인정한다.(참고: 정의채, 《형이상학》 4판 171-177쪽)]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증여를 할 의사를 표하고 자식이 이를 수용했다면, 그 증여의 공로는 아버지에게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사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이를 거절했다면, 증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자식 탓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화된다면 하느님 덕분이고, 어떤 사람이 의화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 탓이다. 따라서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 '''오직 은총'''으로 인간은 의화한다. 또한 자식이 아버지의 증여 의사에 동의하여 증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화한다고도 가톨릭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 역시도 강조하는 이유는, [[야고보서]]에 '행함(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와있듯이 진정한 신앙에는 선행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에 있다는 그 선행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갈라티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라고 서술한다. 후술할 트렌토 공의회 문헌에서 보듯, "선행은 얻은 의화의 열매와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의화의 증대 요인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서술이다. 또한 역시 트렌토 공의회 문헌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 바로 당신께서" "의화한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주입해주시"며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선행을 이끌고 동반하며 또한 뒤따르는데, 그 능력 없이 선행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거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오직 은총'''으로 의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총'이 의화시키는 것과 '선행이 의화의 증대 요인'이라는 것이 모두 가톨릭의 가르침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톨릭 교회에서는 개인이 착한 일만을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성사]]를 통해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으로 의화된다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인 선행도 중요시하는 것이다.[* 물론 개신교라고 해서 '[[예수]]님 믿기만 하면 대강 살아도 천국감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의 회개도 필요 없이 천국 간다"는 식의 [[구원파]]는 100% 이단이다.] 끝으로, [[트렌토 공의회]](=[[트리엔트 공의회]]) 6차 회기에서 의화에 관하여 선언한 것들 중 일부를 서술하겠다. 이는 해당 공의회가 개신교 신학자들을 의식하였고, 이들에게 가톨릭의 교의를 분명히 하는 것을 목적 중 하나로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와 통교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의인이 될 수 없긴 하지만, 죄인의 의화는 지극히 거룩한 그 수난 공로로 의화하는 자들의 마음에[* 참조: 1코린 12,11] [[성령]]께서 작용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확산되고 그들 안에 자리 잡을 때 실현된다.''' 그 결과로, 의화과정에서 인간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자신이 가지처럼 붙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에 천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모든 선물을 받는다. 즉 믿음, 희망, 사랑이 그것이다. 희망과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는 인간은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 신비체의 살아 있는 구성원도 될 수 없다. 이런 연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무용이라고[* 야고 2,17.20.]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의미가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라고[* 갈라 5,6]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 >제6차 회기 의화에 관한 교령. 제7장 죄인의 의화가 무엇이며, 그 원인들은 무엇인가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 참조: 로마 3,28 그리고 다른 곳들.] 그리고 무상으로[* 참조: 로마 3,24.] 의화한다고 사도(바오로)가 말하였는데, 이 말은 가톨릭교회가 옹호하며 표명해온 항구하고 일치된 견해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의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요, 온갖 의화의 기본이며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이고",[* 히브 11,6.]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과 친교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조: 2베드 1,4.]''' 또한 우리는 무상으로 의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화에 앞서 그 어떤 것도, 믿음이나 행업도 이 의화 은총을 얻는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화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 공로로 얻어지는게 아니며, (앞서 언급한 사도의 말대로) 만일 무슨 공로가 있어서 의화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더는 은총이 아니다."[* 로마11,6] >---- >같은 교령. 제8장 믿음을 통하여 무상으로 주어지는 죄인의 의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죄가 용서되지 않고 용서된 적도 없다는 믿음은 필요한 것이다. >---- >같은 교령. 제9장 이단자들의 헛된 믿음을 거슬러 >이제, 받은 은총을 지속적으로 간직했든, 잃었던 은총을 다시 회복했든, 이처럼 의화한 자들에게 사도(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제시되어야 한다.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1코린 15,58]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보여준 선행과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히브 6,10] 그리고 "여러분은 신념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신념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히브 10,35] 그러므로 끝까지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마태 10,22]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으로 하느님의 자녀에게 자비롭게 약속된 은총인, 또한 하느님 바로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따라 그들의 선행과 공로에 신실하게 부여해야 할 상급인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 실로 이것은 사도(바오로)가 자신의 투쟁과 달음질 이후에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고, 정의의 심판관에 의해 자신에게 수여될 것이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던 바로 그 정의의 월계관을 의미한다[* 참조: 2티모 4,7-8.]. [[예수 그리스도]] 바로 당신께서 지체들의 머리로서, 그리고 가지들을 위한 포도나무로서[* 참조: 요한15,1 이하.] 의화한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주입해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선행을 이끌고 동반하며 또한 뒤따르는데, 그 능력 없이 선행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거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화한 자들이 삶의 처지에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일들을[* 참조: 요한 3,21] 통하여, 하느님의 법을 충만하게 만족시키고, 때가 오면 (그들의 은총 지위의 상태에서 죽는다는 조건으로[* 참조: 묵시 14,13])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갖추는 데 그들에게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실로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요한 4,13-14]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의로움은 마치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도 않는다.[* 참조: 로마 10,3] '''우리 안에 머물면서 우리를 의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그 의로움은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그 의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록 성경에서(보잘것없는 당신 제자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상급을 못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고 또한 사도가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라고[* 2코린 4,17] 증언하실 정도로[* 참조: 마태 10,42; 마르 9,41.]) 인간의 선행에 비중을 상당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은총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기를 바라실 정도로 모든 인간에게 그토록 좋으신 분이신[* 참조: 교황 [[첼레스티노 1세]],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보낸 서간」 제12장(PL 50,336; D 141번.] 주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그 어느 그리스도인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조: 1코린 1,31; 2코린 10,17(예레 9,23-24).] 그리고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많기"[* 1코린 4,5]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비와 선만큼 엄격함과 심판도 눈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조금도 없을지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 마태 16,27; 로마2,6; 묵시 22,12] 인간들의 전 인생은 인간의 판단에 따라 측정되고 심판되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 "그분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실 것이며 마음속의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하느님으로부터 각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1코린 4,5] 하느님은 성경에 쓰인 대로, "각자에게 행실대로 갚아주실"[* 마태 16,27; 로마 2,6; 묵시 22,12] 분이시다. >이러한 의화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에 이어서(이 가르침을 각자가 성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의화할 수 없을 것이다.)[* 참조: 아타나시오 신경의 초반부.] 본 거룩한 공의화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을 첨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마음에 간직하고 따라야 할 사항들뿐만 아니라, 피하고 멀리해야 할 사항들도 알게 하기 위함이다. >---- >같은 교령. 제16장 의화의 열매, 곧 선행의 공로와 그 공로의 성격 >1. 만일 누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로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 본성의 힘으로 행하거나 법의 가르침에 힘입어 행한 자신의 선행만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2. 만일 누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단지 더욱 쉽게 의롭게 살게 하고, 더욱 쉽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뿐이기 때문에, 비록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마치 은총 없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로운 삶과 영생을 구현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3. 만일 누가 의화 은총을 얻는 데 성령으로부터 내려오는 영감(靈感) 없이, 그리고 그분의 도움 없이 필요한 만큼의 믿음, 희망, 사랑 그리고 회개를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중략) >10. 만일 누가 우리에게 공로가 되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 없이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바로 그 의로움으로 인해서는 허울뿐인 의인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중략) >24. 만일 누가 인간이 받은 의로움이 하느님 대전에서 선행을 통해서는 보존되거나 증대되지도 않고, 선행은 얻은 의화의 열매와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의화의 증대 요인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 >같은 교령. 의화에 관한 법규들. 결국 의화에 관한 핵심 키워드를 3가지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 오직 은총 * 오직 믿음 *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