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라티아 (문단 편집) === 갈라티아 정착 === [[파일:갈라티아 터키 2.jpg|width=660]] 기원전 200년경 아나톨리아 반도 정세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갈라트 인들은 (자체적인 / 혹은 경쟁국의 피해를 원하는 이웃 군주들의 의뢰에 의한) 대외 침공을 줄이고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였다. 갈라트 인들은 안키라를 중심으로 한 중앙의 테크토사게스, 서부의 페시노스를 중심으로 한 톨리스토보기, 동부의 타비온을 중심으로 한 트로크미의 세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세 부족들은 각각 휘하에 4개의 소집단을 거느렸고, 이러한 12개의 소집단들은 각자의 재판관과 장군을 두었으며 이들과 3백명의 의원들은 성지인 드리네메톤[* 앙카라 서남쪽에 있었다 함]에서 의회를 열어 살인죄와 같은 중대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즉, 갈라티아는 일종의 공화정 국가였던 것이다. 또한 부족 내에 소부족을 두고 전체 회의를 여는 것은 한국 [[삼국시대]]의 5부 체제 및 귀족회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한편 현지 프리기아 / 카파도키아 인들은 마을과 토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갈라트 인들에게 연공을 바쳤고, 갈라트 인들은 주로 요새화된 농장에 거주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