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라티아 (문단 편집) === 갈라티아 왕국 === [[파일:갈라티아 터키.png|width=800]] 기원전 90년경 로마의 동맹국인 갈라티아 전쟁 후 로마의 동맹국이 된 갈라티아는 옛 공화정 체제는 붕괴하고, 세 부족장들이 로마의 인정을 받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기원전 90년경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정복되었다. 이어진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서부 톨리스토보기 부족장 데이오타우로스는 [[폼페이우스]]를 도와 프리기아 전역에서 활약하였고, 기원전 64년 승리 후 그로부터 국왕 칭호와 함께 폰투스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이로써 갈라티아는 단일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변모하였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데이오타우로스는 은인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으나 [[파르살루스 전투]] 후 카이사르 편으로 전향하여 보복을 면하였다. 한편 로마 군단 3개에 해당되는 갈라티아 군은 로마의 보조병으로써 폰투스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내전을 틈타 미트리다테스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가 [[니코폴리스 전투(기원전 48년)|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갈라티아-카파도키아 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서부를 장악하였다. 이집트에 머물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갈라티아에 당도, 데이오타우로스를 사면한 후 [[젤라 전투]]에서 폰투스 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얼마후 데이오타우로스는 손자 카스토르에 의해 카이사르의 갈라티아 방문 시에 암살 음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로마에서 기소되었다. 카이사르의 저택에서 열린 공판에서 데이오타우로스는 [[킬리키아]] 총독 시절 친분이 있던 [[키케로]]가 변호하여 무혐의를 받았다. 이어진 2차 내전에서 데이오타우로스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파벌을 지지했으나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 직전 [[삼두정]] 측으로 전향, [[안토니우스]]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40년 데이오타우로스는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손자 카스토르가 계승했으나 기원전 37년 리카오니아를 통치하던 외손자 아민타스[* 데이오타우로스가 페르가몬 공주 베레니케와 낳은 딸 아도보기오나가 브로기타우로스 (기원전 63년 공동 군주 취임, 기원전 50년 사망) 사이에서 낳은 아들]가 즉위하였다. 본래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전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전향하여 왕위를 지켰다. --대대로 줄타기 장인-- 이후 아민타스는 인근 산지인 호마나다 (호이노나)를 원정하여 그 군주를 죽였으나 복수를 결심한 후자의 과부가 놓은 함정에 걸려 사망하였다. (기원전 25년) 그후 [[아우구스투스]]는 갈라티아에 허수아비 왕을 세우는 대신 로마 속주로 병합하였다. 비록 왕위는 잃었지만 데이오타우로스 가문은 향후 수세기간 갈라티아의 유력 귀족으로 남았다. 아민타스의 아들 아르테미도로스는 동부 트로크미 부족장을 지내었고, 누이인 테크토사게스 부족장과 결혼하였다. 그들의 증손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는 [[트라야누스]] 대에 중용되어 105년 집정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데이오타우로스가 로마 군제로 편성한 1만 4천의 갈라티아 군단은 니코폴리스 전투로 1/3으로 줄어든 후에도 로마의 동맹군으로 활약하다가 병합 후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제1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으로 편성되어 니코폴리스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배치되어 2세기 [[바르 코크바의 난|유대 반란]] 시까지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