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리교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신학반, 신학회) ==== [[1888년]]에 '영아소동'이 일어났다. 이는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수구세력들은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눈을 뽑아 [[사진기]]의 렌즈로 만들고 [[간]]을 빼내어 약으로 쓴다는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무고한 서양인들을 폭행하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고, 종교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재학당]] 내에서 이루어졌던 신학 교육도 상단 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88년]]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육은 [[1893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이는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실려 있는 [[한국]] [[선교]]의 통계에서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893년]]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보고]]나 [[편지]]를 보면 지속적으로 한국인 전도자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크랜턴]]은 [[189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1893년]]에야 비로소 규칙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 안에 이러한 취지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킬 한 반을 개설해 장차 우리 사역자로 양성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신학교]]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돌아오면 이 [[학교]]를 출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로 12명이 선발되었는데, 그들은 1주일에 2~3일 정도 오후마다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과목은 [[성서]], [[설교학]], [[구원론]], [[성서]]개론 등입니다." 즉 공식적인 [[신학교]] 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12명의 [[학생]]들이 정기적인 [[수업]]을 받고 있었으며 교과 과정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1893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에 시작된 '신학반'이 [[1899년]] [[2월]]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전체 [[수업]]은 유쾌하고도 유익한 것이었으며 전 수업 기간을 통해 그 관심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들(21명 참석자)은 이 반을 [[신학]]회로 부르기로 [[투표]]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매번 [[서울]]에서만 모일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도 모이며 [[음력]] [[설날]] 어간이 가장 좋은 시기임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교육 모임의 명칭이 '신학회'로 [[한국인]]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 모임은 '신학회'란 명칭을 결정한 것과 함께 모임 장소를 [[서울특별시]]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도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시켰다. 신학교육의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자 그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지리)|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 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