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리교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감리교협성신학교([[남자|남성]] 신학 교육) ==== [[http://cms.mtu.ac.kr/user/mtu/images/pop/34.jpg]] 1910년대 감리교협성신학교의 전경. 지금의 캠퍼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1887년]]부터 시작된 신학회 교육은 미 감리회의 신학 교육 과정이었다. 당시 [[미국]]의 [[감리회]]는 [[남북전쟁]] 이후로 미 감리회, 남 감리회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 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남 감리회는 별도의 신학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1899년]]부터 미 감리회의 신학회에 학생과 [[1903년]] 무스, 하운센 등을 [[교수]]로 보내, 미 감리회에 위탁 교육을 시키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신학회는 초기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로도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독자적인 조직과 선교 통로를 지니고 있던 두 [[감리회]]가 [[한국]]에서는 연합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후 초교파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두 [[감리회]]의 일치와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신학 교육에서도 나타나, [[1905년]]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회]] 안에서 제기되고 마침내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감리교협성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 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고, 그 결실이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1907년]] 감리교협성신학교가 설립된 후, [[1910년]] [[4월]]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에서 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