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리교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감리교신학대학]] 시대([[1959년]]~[[1993년]]) === [[1959년]] 감리교신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은 같은 해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 연합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은 과거 수십 년 간 우리의 숙제였던 [[대학교|대학]] 승격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금년 4월 1일부터 정규 대학의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할 것입니다. [[1959년]] 4월 1일 이후 학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고 [[홍현설]] 교장이 제 1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웰치 감독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이 있기 2달 전인 [[1960년]] [[2월 21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새 본관 공사에 착수하였고, [[10월 31일]] 새 본관[* 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1969년]] 선교 [[대학원]]이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고,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어 부설 연구소를 두었다. 부설 연구소에는 [[기독교]] 교육연구소(소장: [[은준관]] 교수)와 한국교회 선교 문제 연구소(소장: [[홍현설]] 교수) 등이 있었다. [[1977년]]에 [[홍현설]] [[학장]]이 정년 은퇴했다. [[1977년]] [[6월]], 그 뒤를 이어 [[윤성범]]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윤성범]] 교수부터 학장을 4년 임기제로 하였다. [[1980년]] [[2월 11일]] [[윤성범]] 학장에 이어 [[김용옥(신학자)|김용옥]] [[교수]]가 제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옥(신학자)|김용옥]] 학장은 학장 재임 기간인 [[198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1981학년도 입학정원 증원 및 기독교교육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신학대학원(Th. M. 과정, M.Div. 과정)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도서관을 신축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김용옥(신학자)|김용옥]] 학장은 도서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간염으로 돌연 소천하였다. [[김용옥 (신학자)|김용옥]] 학장의 뒤를 이어 [[1981년]] [[2월 14일]] [[박봉배]] 박사가 제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7월 15일]]에 도서관이 준공, 개관되었는데,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병사한 [[김용옥 (신학자)|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신학자)|김용옥]] 학장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982년]] [[6월 29일]]에는 종합관이 준공되었고, 충정로 3가 구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종합관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종교철학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종합대학화 계획과 학장 종신제 추진 등의 이유로 [[1982년]], [[1985년]] 2번의 학내 사태가 일어났다. 2번의 걸친 사태 후 [[박봉배]] 학장이 학장직을 사임하고 퇴진하였다. [[1987년]]에는 이사회가 퇴진하기에 이른다. [[1985년]] [[박봉배]] 학장이 사임한 후 [[송길섭]] 박사가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30일]]에 기독교교육과를 기독교교육학과로 개편하였다. [[감리회]] [[신학]]의 토착화 전통은 변선환 교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학문적 전통에 대한 교단의 일부 세력이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교단과 학교 간에 학문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2년]] [[6월 26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 모임에서 변선환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가 일어났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감리교 부흥단은 변선환 [[교수]]가 [[사도신경]]과 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부인했다는 일종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고 변선환 [[교수]]의 감리회 정회원 자격 정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오경린 감독회장이 변선환 [[교수]]로 하여금 해명서와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도록 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를 아예 뿌리뽑을 수 있는 주장'''이라서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주장을 크게 경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