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산파 (문단 편집) == 특징 ==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은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김일성의 독재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에서는 김일성의 편을 들긴 했으나,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흐름이 역력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의 전통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북한 사회를 이끌려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갑산파가 중심적으로 관심을 가진 전통 사상가는 바로 다산 [[정약용]]으로, 이들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이는 곧 김일성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당연한 소리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통제와 허락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정치적 움직임 자체를 전혀 묵인하지 않는 성향이었던 데다 공산권에서 이념은 모든 정치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민주주의 사회보다 훨씬 그 중요성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산파가 김일성과 만주파와 구별되는 사상적 흐름을 조직한다는 것은 김일성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중공업]] 중시 정책을 추구하면서 군비 확장에 골몰했고, 빨리 남한을 [[적화통일]] 시키겠다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갑산파의 중심 인물인 [[김도만]]과 [[박금철]], [[리효순]] 등은 이런 김일성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김도만은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 국민총생산([[GNP]]) 기준 시절, [[일본]] 재계에는 '''"국방비가 GNP의 6%를 넘어가면 그 나라 살림이 거덜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격언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국민총생산(GNP)의 10% 이상을 국방비로 할당하는게 다반사였다. 참고로 [[냉전]] 시대 미국과 서유럽 NATO국가들 그리고 대한민국은 줄곧 GNP의 6~6.5% 정도를 국방비로 지출했으며, [[이스라엘]]도 최근까지 6%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가 파탄나지 않는 수준에서 쓸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면 될 듯하다.] 줄이고 인민 생활 향상에 힘 써야 한다."라는 주장을 폈으며, "공장 및 관리소에서 지배인(책임자)의 권한을 높이고 당일꾼의 간섭을 줄여서 사실상 경제 정책은 경제 전문가에게 맡겨라."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김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면 [[소련파]],[[연안파]]가 특정한 리더가 없고 결속력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던 반면 갑산파는 갑산공작위원회 시절부터 박금철을 리더로 하여 결속력이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 김일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명분상으로도 밀리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