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의 말로 == [[파일:attachment/갑신정변/Gapsin_Coup.png|align=center]] * [[홍영식]]: 고종의 "경들은 날 놔두고 어딜 가는가?"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위안스카이]]와도 안면이 있었고, 벼슬도 꽤 높은 사람이라서 "죽이진 않겠지" 했던 것 같지만 오조유가 이끈 청군이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과정에서 조선군에게 살해당했다. 덤으로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이었음에도 그 일로 자결한다. *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하여 10여 년을 방랑하며 지낸다. 내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보낸 자객을 잘 피해다니다, [[상하이]]에서 결국 자객 [[홍종우]]에게 리볼버로 살해당한다. 이후 시신은 보존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고, 이후 그의 시신은 [[오체분시]]를 당하고 머리는 한성에 효수되며 시신은 전국 팔도를 유람한다. 참고로 양부 김병기는 갑신정변 이후 6~7년간 옥살이 하다가 죽었고, 생부와 동생도 옥사했으며,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결했으며,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다. * [[박영효]]: 이후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갑오개혁]] 중 2차 [[김홍집]] 내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의도로 귀국. 복권되어 정부에서 일하다가 고종을 몰아내려는 반란 음모를 꾸미던 중 발각되어 다시 일본으로 탈출한다. 이후 고종이 싫어하는 인물 순위권에 꼽히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서 독립 협회에서도 박정양, 윤치호와 더불어 세력이 강했고 '박영효 [[대통령]] 음모설'까진 나왔다. [[독립협회]] 주도로 개설된 중추원의 첫 의제였던 대신 추천에서도 한 자리했다[* 그런데 대신 추천 자체가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월권이고, 추천된 인물이 죄다 박영효, [[서재필]] 등 고종에게 찍힌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추원 해산 → 독립 협회 강제 해산의 순서를 밟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덤으로 관료 추천은 필적 감정까지 해서 누가 누굴 추천했는지 모조리 색출했다고.]. [[경술국치]] 후에는 후작 작위[* 일본이 처음 조선귀족으로 서임한 후작은 단 6명이었는데, 이들 중 4명은 왕족, 나머지 둘은 왕실의 인척인데 박영효는 철종의 고명딸 영혜옹주와 결혼한 부마였고,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인 국구였다. 그 유명한 이완용도 처음에는 백작으로 서임되었다가 나중에야 후작으로 승작되었다.]를 받는 등 부유한 친일파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홍영식과 함께 참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도 열 살 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 [[서재필]]: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일가와 집안이 전부 몰락하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나중에 [[독립협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미국인 필립 제이슨 (Philip Jaisohn)'''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인 교포들을 위한 지원도 자주 했다. * [[서광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미국]]에 호의를 갖게 되어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조선인 최초로 학위를 획득한 뒤 시민권을 취득하고 연방 하급 관료로 일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잠시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서 사법 개혁을 맡았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주미 공사로 파견되었지만[* 당시 서광범은 [[이중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인이 주미 조선 대사로 파견된 셈이다.]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파직되었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 [[변수(1861)|변수]]: 2000년대 와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영어를 공부하고 1887년 [[메릴랜드 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한국 역사상 첫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한국 최초 미국 유학생은 1884년 거버너 담마 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입학한 유길준이고, 대학입학은 변수의 동문인 민주호와 함께했다.] 만 30세인 1891년 6월에 대학교를 졸업하지만 4달만이 10월 22일에 열차사고로 사망하고 미국에 그의 무덤이 지어졌다. 오랫동안 무덤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3년에서야 행적이 드러나 비석도 새롭게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