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긍정적 ===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이 반역을 일으키게된 결정적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미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 모험인데 단지 입지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변일당의 권력욕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당장에 오늘날 갑신정변을 비판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들이 내세운 14개조 정강 항목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개혁의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일본을 모델로 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순 없다. 온건개화파가 모델로 삼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청나라는 양무운동이 [[청일전쟁]]과 [[의화단 운동]]의 패배로 결국 조국 독립을 유지 못함으로써 무능이 드러난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온건개혁의 한계를 느끼고 일본 권력구조의 근간인 봉건제와 신분제 폐지를 과감하게 이루었고 결국 부강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보았을 때 일본을 모델로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유교의 전제정적 신분구조를 유지하면서 자력갱생을 시도해보아야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서구식으로 국민교육 보급과 1차 산업위주구조에서 탈피를 시도 하도록 개혁을 하면, 결국 양반의 경제적 권력근간인 대지주로서 권위가 약화되고 양반의 권력은 약화되게 된다. 그래서 갑오개혁 때까지 끝끝내 토지개혁은 양보하지 않았음에서 기득권이 중요시 여긴 대상을 알 수 있다.[* 단, 갑신정변도 토지 개혁에 큰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일본을 끌어들인 것 역시 불가피한 사정에 가깝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후 청에 의해 군사,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상태였다. 특히 군사적으로 청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주둔하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으며 이를 비판한 한성순보를 청이 문제 삼은 사건도 있었다.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해도 청나라의 개입을 막을 역량이 없었고, 이런 점에서도 일본을 끌어들인 건 불가피한 사항이었다. 갑신정변은 [[반역]]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평가 절하될 이유는 없다. 왕에게 적대한 것으로만 치면 [[프랑스 혁명]]도 반역이다. 단지 [[반역]]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시기 설정이 서툴렀다는 데에 비판의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