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부정적 === 갑신정변은 청이라는 또 다른 기존의 외세를 제대로 의식하지 않은 '''실패한 정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인 고전적인 [[반정]]에 가깝다. 가장 큰 문제는 '''자체적인 군사력이 없어서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였다'''는 것. 한마디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갈아치우면 일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정변의 성공을 위해서는 충분한 무력과 그 무력을 사용하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당시 조선은 청국군이 주둔해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청국군 전체는 아니어도 주둔군을 압도하거나 혹은 주둔군의 개입을 무마할 뒷공작 정도는 있어야 했다.[* 이 점이 조선시대의 여러 [[반정]]보다 갑신정변의 난이도가 높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구한말 이전 조선은 사대를 했을지언정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일단 정권은 소규모 병력으로 쉽게 엎을 수 있었고 정통성만 확보한다면 중국으로부터의 승인은 나중에 받아도 무방했다.] 그런데 당시 갑신정변 세력의 무력이 되어줄 소규모의 일본 공사관 수비대는 청국의 조선 주둔군과 맞서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고, 일본 공사는 10년 전 [[오쿠보 도시미치]]가 보여준 것처럼 청군에 대항할 의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쿠데타는 비밀 엄수가 최우선이기에 직접 행동에 나서는 병력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당장 코앞에 있는 비무장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은 스스로 지녀야 함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유사시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라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민중들은 왕을 따르고 보위하는 근왕 이념이 강했고 왕을 속이고 신하를 참살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더불어 양반 권력의 근간인 토지 제도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이전 개혁의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중들은 14개조 정강의 내용에 공감하거나 개혁의 진정성이 있다는 인상을 받기 힘들었을 것. 더불어 외세를 몰아낸다는 이유로 또 다른 외세를 끌고 오는, 심지어 그나마 전통적 중화의 이미지라도 있는 청을 내몰고 오랑캐 취급을 했던 일본을 들이는 모습에 민중들이 거부감을 느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근왕 이념에서의 발전형을 보여준 것이 후반기의 [[독립협회]]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립협회가 포섭한 백성은 자기들 영향력 범위에 닿는 [[한양|도성]] 한정. 더구나 그 '지지'란 것도 근본적으로 '근왕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역성혁명|조선 조정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 과정에 있어서 소수나마 민중의 반발이 없었던 사례는 없을 것이고, 반드시 민중의 전폭적 지지 아래 정변이 이루어지는 사례만 존재한 것도 아니기에 본래 백성의 지지가 꼭 필수불가결한 요건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워낙에 지지 세력이 확고하지 못한 갑신정변이었기에, 민중들에게라도 지지를 얻었다면 3일 만에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며 민중 혁명이라는 새로운 의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을 옹호하는 입장은 3가지가 있다. * 갑신정변의 내용이 일부 갑오개혁에 이어진다. * 보수파를 제거한 공로가 있다. * 어차피 조정이 막장이었으니까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선 갑오개혁 자체는 김홍집을 비롯한 온건 개화파에 뿌리를 둔 갑오파의 조선 관료들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그 시작을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시작해 외세의 개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갑오개혁에는 항상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 외세가 갑신정변 당시 손잡았던 그 일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비슷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그 비슷하다는 부분은 근대국가에서 일반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여기서 오해하는 부분이 갑오개혁을 급진 개화파에 뿌리를 둔 갑신정변 세력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은 온건 개화파 출신인 김홍집과 관료들이 한 것이었다. 먼저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급진 개화파와 김홍집의 온건 개화파는 정작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 덕분에 조정에 다시 참여하기는 했지만 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온건 개화파의 권력을 빼앗기위해 쿠데타 같은 비열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만 하였다. 실제로 급진 개화파 박영효는 또다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망쳤다. 급진 개화파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적도 없었다. 갑오개혁은 오로지 온건 개화파 출신인 김홍집과 그를 따르는 관료들이 이뤄낸 성과였다. 두 번째는 수구파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진정한 수구파라고 볼 수 있는 위정척사파들은 이미 임오군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몰락했기에 당시 조정에는 개화파들이 주류였다. 애시당초 수구파는 거의 없었고 나머지는 비주류로 전락해서 제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김옥균 일당이 개혁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파(온건 개화파)를 수구파라는 억지논리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민씨 세력은 외척이니 죽이고, 개화 반대파는 반대파니까 죽이고자 했고 일부 온건 개화파들도 죽이고자 했다. 상단에 기록된 윤웅렬의 이야기 가운데,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라고 했는데, 이 신하들이 바로 온건 개화파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상재]], [[민영익]] 등은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에도 참여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들의 상당수를 제거하고 자기들도 제거되면서 조정 내의 개화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더구나 죽은 사람만 봐도 윤태준[*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 청과 일본올 오갔다. 친군후영사.], 한규직[*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 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 개편 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 개화파의 한 가지 불만이었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이조연[*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 등 영선사 출신으로 새로운 군제 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민씨 중에서 개화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인 민영목[* 오경석, 박규수와 함께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 통상 수호 조약을 포함한 외교 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망시에는 해상 방어 사령관인 해방 총관이었다.], 민태호[*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 민영익, 민응식[* 갑신정변 당시 유일하게 칼을 맞지 않은 인물답게 개화 쪽 역할은 적다. 방곡령 당시 일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노력한 인물.]의 소위 4민 중에서 민영목과 민태호는 죽었고, 민영익은 부상당하면서 이들이 극렬 급진 개화파 배제론자가 되게 만들었고, 이외에도 조영하[* 신정 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 관계이다.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 대원군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 대비와 대원군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 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 수호 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 등도 같이 죽었는데 이들 주요 인물들 중에서 개혁에 근본적으로 방해가 되었을 인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갑신정변의 배경은 우정국 창립 축하 연회였고, 여기에 참석하려고 했던 이들이나 수호를 맡았던 이들이 죽은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윤치호의 언급처럼 갑신정변 실패 후 민심에 이반이 생겨 10년간 개화의 ㄱ자도 못 꺼내는 10년간의 '''후퇴'''가 일어난 최악의 형태로 실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은 '''조정이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가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문제가 있다. 갑신정변의 트리거로 꼽히는 3가지로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오지 못한 것, 민영익이 온건 개화파로 선회한 것, 박영효가 이끌던 군대가 친군영에 흡수된 것 등을 꼽는데 이것은 모두 개화의 좌절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 감소일 뿐이다. 급진 개화파는 개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탐관오리가 있다거나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 아니라[* 민씨 척족에 대한 문제점을 적어두었는데, 정작 민영익이 이탈하기 전까지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의 집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친일이 아니라 친청이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민씨 세력의 상당수는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면서 청과 연줄이 생겨서 청에서 진행하던 양무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온건 개화파가 되었고, 보다 세력이 작고 젊었던 이들은 수신사나 보빙사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결과 일본과 미국에 연줄이 생겼고 당시 일본에서 진행하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 개화파가 되었다. 단적으로 민영익이 급진 개화파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정사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차이와 의식는 없었다.], 자신들이 아니라 온건 개화파 주도로 정국이 운영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절대 다수의 급진 개화파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고, 그 개화를 자신들이 하려고 노력했다. 즉, 개화에 대한 제한적 지식과 외부와의 연줄에 의거해서 자신의 권력욕과 의지를 추구했다. 급진 개화파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김홍집 정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몇 안되는 예외이고, 일제 시대에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키우기 시작한다. 사해당파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지만, 정작 관직 분배를 한 것은 온건 개화파가 아니라 종친 우대라는 명목으로 대원군 계파에게 분배한 것이다. 대원군계가 개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일이다. 만일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외세를 최초로 조직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급진 개화파이고, 그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면 그 성공 가능성과 이후 상황을 모두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급진 개화파가 보여준 시각은 독립 협회 시기까지 미뤄보아도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걸 위해서 너무나도 큰 도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최악급으로 나왔다. '미국의 독립 전쟁처럼 일단 일본의 지원을 받고 나중에 힘을 길러서 일본으로부터 자립해 나갔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면 지나친 가정이기에 언급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이런 소리 하던 사람들[* 여기에는 갑신정변 때 안 죽은 박영효 등이 포함된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고려할 대상이 못된다.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롤모델로 삼았다고는 했는데, 민씨척족들이나 온건 개화파들을 회유를 통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보다 정변을 일으켜서 무자비하게 제거하려는 방식을 생각해 보았을때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웅번들 중 가장 과격한 [[조슈 번]]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조슈 번도 [[금문의 변]]때 교토 황궁을 대포로 포격하고 [[고메이 천황]]을 납치하려고 시도해서 조적(朝賊)으로 낙인찍혔는데 다른 웅번들([[사쓰마 번]], [[토사 번]])의 도움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다. 즉 다른 웅번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조슈 번도 급진 개화파처럼 패망할 운명이었다. 조슈 번한테 나름 천운이 따라준 것이다. 급진 개화파는 한마디로 천운이 따라주지 않은 언[[럭키]] 조슈 번이었던 것. 차라리 롤모델로 조슈 번이 아니라 다른 번들을 포용한 공의정체론을 주장한 토사 번 노선으로 선택했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싹 제거된 덕분에 일본이 세력 확장을 꾀했을 때 기존의 친일파들이 배제되어서 외부의 친일파들을 파견하거나(박영효), 그나마 협상 가능한 온건 개화파들을 끌어들이는(김홍집, 박정양)[* 이 둘은 모두 조사 시찰단 파견 경력이 있다.] 우회적인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후 일본의 침투는 조정과 고종에게 대단한 경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변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청의 반발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데, 애초에 일본군은 제대로 교전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후퇴했을 뿐이다. 이 음모에 한몫 거든 [[일본]] 입장에서 평가하더라도 갑신정변은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은 그나마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순수하게 호의를 가지고 문명 개화의 파트너로서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일본통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고, 조선 왕실에서도 정변을 후원한 일본 정부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철저하게 축출당하고 청의 영향력은 극적으로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상황은 10년 뒤에 [[청일전쟁]]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에 큰 역할을 한 일본 공사 타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1842년~1917년)는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 정계를 떠나야 했다. 남의 나라에서 쿠데타를 주도한 데다가 실패해서 일본의 국익에 큰 해를 끼쳤으니 외교관으로서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갑신정변을 고종과 민씨 세력이 이끄는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외환죄]]에 해당한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끌어들인 영선사 일행을 꼽을 수 있는데, 임오군란은 내부 반란에 대해서 기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 군세를 끌어들여서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외국과 내통하여 해당 정부에 대항한다'는 외환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이후 청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당시 조선 왕실을 포함한 세력들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으며 수긍했다. 반면, 갑신정변은?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 탈취를 기도'''했다. 이들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급박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빌려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외환 유치죄에 해당한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온건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해서 개화가 늦어질 수도 있다 같은 것은 외환죄에 대한 범죄 조각 사유가 될 수 없다. 이들과 비교될 만한 조선시대 인물이라면 [[황사영]]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나중에 벌어진 [[을미사변]]때도 갑신정변때 행동대원으로 참여했던 [[유혁로]], [[정난교]]가 [[명성황후]] 시해하는데 가담했다. 이정도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조선왕가 입장에서는 반역을 밥먹듯이 해대는 무리에 불과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