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정변 주도 세력의 인적 구성 == ||[youtube(4WJ5TDCa3TI)]|| 조선 후기에 봉건 체제의 틀을 깨트리고 자본주의 및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상을 가진 급진 개화파들(일부 중인 출신 지식인 및 양반들)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뭉치게 되었다. 급진 개화파들은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 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들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권세가인 남양 홍씨, 아버지는 영의정 홍순목, 본인은 종2품 병조 참판.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도 칭찬할 만큼의 인품을 소유했다. 신사 유람단(조사 시찰단)의 일원이기도 하였으며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도 건너갔었던 인물이다. 우정국 사건도 사실 이사람 없었으면 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우정국 총판이었다.(이것은 조선시대 병조에서 군사와 우편업무까지 담당했기 때문이다.)],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1862)|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박영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유사한 표현으로 급진 개화파는 독립당, 일본당, 김씨당 등의 표현이 있고 온건 개화파는 사대당, 청국당, 혹은 민씨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상대에 대한 비칭이다. 이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당파성론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급진 개화파에 대한 표현이 아주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온건파 거두인 [[김홍집]], [[김윤식(조선)|김윤식]]은 정변 때 급진 개화당이 내각에 넣어주었고 [[어윤중]]은 급진파, 친일파들과 가깝게 지냈다. 또한 [[갑오개혁]] 때만 봐도 온건 개화파와 민씨 척족의 대립 역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개화당, 반대파는 수구당이라 불렀는데 이 시기 왕후의 영향력 자체가 의심스러운 데다, 온건 개화파를 통으로 수구당에 묶어서 민씨 세력으로 넣는 이 논리는 나중에 일제가 아주 잘 써먹었다.] 급진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지를 모으는 한편, 개혁 운동의 수단으로써 당시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의 일본 수신사 및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