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삼일천하]] === 그러나 개혁안을 공포도 하기 전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의 주역임을 눈치챈 '''[[명성황후]]가 [[위안스카이]]에게 청군의 파견을 요청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회궁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변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창덕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경우궁과 달리 창덕궁은 겨우 1~200명 남짓 되는 병력으로는 수비하기 너무 넓었다. 12월 6일 오후(2일차) 청군 1,500명이 창덕궁을[* 청군 외에도 4영의 조선군 일부도 함께 하였다.] 공격해 들어왔다. 청군과 정변군·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조선군과 청군 상당수가 사망 또는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2명이 전사, 8명이 부상을 당했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500&code=kc_age_40|#]]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으로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고,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12월 7일 셋째날이 밝자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들어 [[주한일본공사관|일본공사관]]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12시가 되자 일본 공사관에서 불이 일었다.[*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민중의 공격이 계속되자 오후 2시 30분에 일본 공사는 한성을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김옥균·박영효 등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일본군과 함께 인천으로 따라갔다. 퇴각하는 이들 일행은 조선 군인과 민중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9명과 일본 공사 일행은 12월 8일 새벽 인천의 일본 영사관에 도착했으며, 12월 10일 배에 올라 일본으로 떠났다.[* 이때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 숨어있었는데 고종의 명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온 묄렌도르프가 그 배의 선장에게 반역자가 숨어있으니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했으나, 선장이 '내 배에 탄 사람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의지로 없다고 거짓말하고 허공에 총을 한발 쏘면서 그들을 넘기지 않은 채 제물포를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게 사실은 훗날 김옥균을 찬양하는 일제강점기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지어 공신력 있는 역사 만화들에도 버젓히 나오지만 사실은 야사라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공사는 하나부사도 아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였다. 게다가 일본 선장 한 사람이 권총 들었다고 그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건 그야말로 넌센스다.] 이때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유혁로(柳赫魯)·변수(邊燧) 등 9명이었다. 남은 행동대원들은 대역죄로 처단되고 관련자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계에서 숙청을 당하면서 개화파 세력들은 위축되었으며, 개화정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자 적반하장으로 조선 정부에게 배상하라며 군함 7척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해서 [[한성조약]]을 체결한다. 더 나아가서는 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의 알력 다툼이 심해져 훗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