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신정변 (문단 편집) == 정변 이후 == 조선의 정변을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화되며 일본과는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정변 이후 청은 정변에 대한 정보 획득이 늦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이홍장]]은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위하여 육상 전신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종]]도 이에 동의하여 1885년 5월 전신선의 가설에 청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1885년 9월에는 [[인천]]과 [[한성]]을 잇는 전신선을 가설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평양]]에 전보분국을 설치했다. 또한, 11월 말에는 [[의주]]로 이어지는 전신선을 가설했다. 청과 조선에 주재하던 [[원세개]]는 1894년 청일전쟁까지 전신선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의지를 보다 쉽게 관철할 수 있었다. 정변 과정에서 대립하던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청•일 양군은 철수하고, 이후 조선에 파병할 때는 상대국에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 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영구제명|빼어 버리거나]] [[피휘|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