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동희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파일:attachment/500hdt_0.jpg|width=375]]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허재|허]]-동-[[김유택|택]] 트리오'''의 사진. 가운데에 있다. 이미 [[김유택]]과 [[한기범]]이 지키는 골밑에 더해 [[허재]]가 이끄는 가드진이 강했던 기아자동차는 농구대잔치 2년 연속 우승을 하고 있었고, 센터 김유택과 포인트 가드 유재학이 불참했던 시즌에도 우승을 할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 허재가 포인트 가드를 맡았었다.] 그러다 강동희가 입단하게 되었고 중앙대 시절처럼 공격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 가드가 되었다.[* 유재학은 1990년도에 은퇴했고 그해에 강동희가 입단하였다.] 처음 참가했던 대회는 1990년도 봄에 열린 코리안 리그였으며 같은 해 7월 군에 입대하여 이듬해 1월 초까지는 상무에서 뛰었다.[* 6개월 방위] 상무에서 제대한 뒤에는 다시 기아자동차에 합류하였다. 송곳같은 패스로 팀메이트들에게 득점을 연결시켜 줬지만 게임 리딩 능력은 다소 부족해 허재와 게임 리딩을 나눠 봤었다.[* 유재학이 있었을 때에는 허재가 공격에만 집중하며 들개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강동희가 들어온 이후에는 게임 리딩을 나눠 하느라 들개같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스포트라이트는 가장 화려했던 허재가 주로 받았지만, 강동희 역시 이에 뒤쳐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팀에서 가장 빛났던 세 선수의 이름을 따서 흔히 허-동-택 트리오라고 부르는 강력한 전설이 태동한 것이다. 대신 부수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워낙 전력이 막강하다 보니 노력을 대충해도 이겼다는 거. 강동희 자신도 말술로 유명하고, [[허재]]의 술이야 뭐 사고로 너무너무 유명했다. '''그런데도 이겼다'''(…). 자연히 나태해 질 수밖에 없던 것. 농구대잔치 5연패를 해버리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연세대학교]]를 위시한 대학세의 돌풍이 불어닥친 1990년대 초반에 자연히 해결되었다. 기아자동차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그들의 직속 후배 격인 중앙대학교에 8강에서 지는 수모를 당한다. 정신차린 그들은 곧바로 1994-95, 1995-96 시즌을 모두 우승하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어쨌거나 강동희는 허재, 김유택에 비해서는 사생활이 깨끗했고[* 허재는 음주 사고, 김유택은 불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덜 까였다. 그리고 화려했던 농구대잔치를 기반삼아 1997년에 프로가 생길 때, 가장 영향을 안 받은 포지션은 외국인 선수에게 볼 배급을 하는 포인트 가드였다. 외국인 선수의 도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노쇠 기미가 보이던 [[김유택]]은 벤치멤버가 되었다. [[포워드(농구)|포워드]] 자리에는 선배 못지 않은 [[김영만(농구)|김영만]]이 보강되었다. [[허재]]가 [[최인선]] 감독과의 불화로 일부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할 때, 강동희는 팀의 주축으로 프로 원년인 1997시즌에 맹활약했다. 평균 15.6득점,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프로 초대 어시스트왕 및 MVP에 올랐다. 이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평균 18점을 넣으며, 역시 초대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허재]]가 결국 팀을 떠나 원주 나래로 이적했고, 김유택이 1999-2000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에도 기아의 구심점으로 계속 남아 활약했다. 1997-98 시즌 올스타전 MVP, 기아 소속으로 어시스트 1위 4회. 1998-1999 시즌 이후로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지만 강동희는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팀 내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이대로만 가면 누가 보더라도 기아의 전설로 은퇴할 것이 확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