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량욱 (문단 편집) === 해방 이전 행적 === [[주오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육촌 형 강돈욱이 창립한 창덕소학교 부임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창덕소학교 교사로 근무한 시절에 외종손 [[김일성]]의 담임으로써 그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 때 인연은 훗날 해방 후 북한에서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하는데 있어 이점으로 작용했다. 강량욱은 창덕소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에 진남포득신소학교로 전근했고 1930년대 중반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교사생활을 계속했다. 1930년대 중반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43년 3월 평양신학교롤 제38회로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 1944년 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3년 창립된 평양 고정교회[*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유관지 목사가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고정교회 담임목사 시절의 강량욱은 건장한 체구에서 나오는 좋은 성대로 찬양을 잘 인도하고, [[사경회]]도 잘 인도해서, 별명이 "사경회 목사"였고 때로는 "제2의 김익두"[* 일제강점기 유명한 부흥사이자 목사였던 김익두는 해방 후 북한 정부에 협조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총회장을 지냈지만 [[6.25 전쟁]] 중 북한 정부를 배신하고 국군·UN군을 지지하여 총살되었다. ]라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한다. 설교 실력도 뛰어나서 [[월남]]한 [[개신교]] 신자 중 [[광림교회]] 원로 [[김선도]] 목사, 전(前) 인천제2교회 담임 이삼성 목사 등 고정교회 담임 시기 강량욱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인사들은 그의 설교 실력을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했다. 강량욱은 광복 후에도 계속 고정교회를 담임했는데, 1946년 3월 13일 일어난 암살 시도 사건 때까지 교회 목사 사택에 거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